내일의 눈
입주자대표회의만큼만 해라
서울 동대문구 한 아파트단지에선 지난해 캠핑 행사를 열었다. 단지 광장에 집집마다 들고 온 텐트를 치고 함께 고기를 구우며 별을 감상했다. 앞서 이 단지에선 ‘이웃 간 인사 나누기’ 캠페인을 벌였다. 별 것 아닌 것 같던 인사 나누기는 주민갈등 해소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층간소음갈등이 현저히 누그러진 것이다.
이 단지엔 세대수에 비해 규모가 큰 유·초등생 돌봄시설 ‘우리동네키움센터’가 있다. 당초 기준에 비해 공간이 좁아 서울시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다. 주민 공용공간을 허물어 키움센터를 만들자는 제안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하지만 돌봄시설이 있어야 젊은 부부들이 이사 오고 젊은이들이 많아져야 아파트 가치가 오른다는 입주자대표회의 설득에 주민들이 동의했고 넓고 시원하게 만들어진 센터엔 신청자가 줄을 선다.
이 단지의 특별함이 돋보이는 행사는 ‘단지에서 새해 일출보기’다. 전망이 좋은 건물을 골라 옥상에서 주민들이 함께 해맞이 행사를 진행했고 단지 광장에선 200명이 함께 떡국을 나눴다. 행사 준비에도 정성을 다했다. 이틀전부터 사골을 고아 국물을 만들었고 음식 솜씨가 좋은 주민을 모셔와 상을 차렸다.
주민들 단합은 친환경 캠페인으로 발전했다. 냉난방비를 아끼고 에너지를 절약해 환경보호에 앞장서자는 학습 모임에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다. 안 입는 외투를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주는 행사엔 200여벌 겨울옷이 걷혔다.
이들 모습을 보면서 2024년 대한민국 정치권이 떠올랐다. 총선에 돌입한 지금 정치권에선 자치와 민생이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서울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이야기가 없으니 동네 이야기는 더더욱 찾기 힘들다. 높은 분들 입에선 돈을 어디서 구하려고 저러나 싶은 초대형 공약이 쏟아지고 여야 거대정당은 상대 후보 비방으로 날을 샌다. ‘운동권 청산’ ‘검찰공화국 심판’ 구호가 난무하는 사이 3알짜리 양파 한망은 6000원이 됐고 붕어빵 한마리는 1000원이 됐다.
정치무용론을 꺼내려는 게 아니다. 정치혐오를 조장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구·시의원도 아닌 1000세대 아파트 입주자대표자들이 자기 주머니를 털어 떡국을 끓이고 몸 불편한 어르신을 위해 해맞이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정치권은 얼마나 생산적인 일을 했는지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나랏일 하는 분들을 동네 이장들 대표들과 비교하느냐고 나무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되묻고 싶다. 나랏일이 무언가. 국민들 등 따시고 배 안 곯고, 서로 싸우지 않게 만드는 일이 핵심 아닌가. 오늘도 상대 비방에 목울대를 세우는 정치인들에게 한마디 드리고 싶다. 입주자대표들만큼이라도 민생 돌보시길, 동 대표만큼이라도 주민 화합에 나서주길.
이제형 행정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