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투르크 1민족 5국가가 주는 시사점
2024년 들어 북한은 남북관계를 새롭게 규정했다. 이른바 1민족 2국가 개념에서 출발하면서도 ‘1민족’ 의미는 축소하고 ‘2국가’를 부각시켰다. 이미 1980년대 동독이 동서독 관계를 국가 간 관계로 규정한 바 있으니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분단 당사자 간 경쟁이 한편의 일방적 우위로 기울어지는 경우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독일은 자국의 패전으로 1민족 2국가로 전락했고 한반도는 일본의 패전으로 1민족 2국가로 독립했다. 1990년대 미소 관계의 전환기에 동서독은 하나가 됐으나 한반도는 그러지 못했다. 국제정세의 흐름과 분단 당사자의 대처에 따라 시작과 끝 모두가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세계질서 전환과정에서 탄생한 유라시아의 투르크 1민족 5국가 사례도 맥을 같이 한다. 한반도 분단 상황과도 유사한 점이 있으면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동서양 사이에서 하나의 제국을 이루었던 투르크 민족은 18~19세기 청나라와 러시아의 점령으로 국가가 소멸한다. 1세기가 지난 무렵 소련 붕괴로 러시아 점령지역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등 투르크 5개국이 독립했다. 1민족 5국가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별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같은 언어를 구사한다. 서쪽의 아제르바이잔과 동쪽의 키르기즈스탄이 서로 소통하면 50% 이상 이해한다고 한다. 우리의 함경도와 전라도 간 소통이 비슷하지 않을까. 언어 이외에도 ‘말과 활’의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전통을 공유한다. 모두 이슬람을 신봉한다. 사고방식도 서로 유사하다. 상호 유대감도 있고 공유하는 정체성도 있다. 과거 한때 대두되었던 ‘범투르크주의’가 이와 무관치 않다.
투르크 5개국 정치 경제 발전은 진행형
투르크 5개국은 소련 내 자치공화국이었다. 소련 붕괴로 갑자기 독립국가가 됐다. 급격한 사회주의 체제 붕괴 과정의 혼란 극복 과정에서 5개국은 각자도생을 시도했고 지배엘리트들의 위상은 더욱 강화됐다. 공유하는 동질성과 유대감을 바탕으로 통합을 시도할 기회가 있었지만 여유도 없었고 관심은 다른데 있었다.
투르크 5개국은 정치적 안정과 시장경제 정착을 지향했다. 비슷한 출발점에도 불구하고 부존자원과 정치역학에 따라 서로 다른 행로를 선택했다. 부존자원으로 급성장하는 국가도 있고, 인적자원을 중시하며 발전을 시도하는 국가도 있으며, 혈연 기반의 권력승계를 이룬 국가도 있고, 시민혁명을 관철시킨 국가도 있다. 정치 및 경제 발전은 아직 진행형이다.
역사·문화적 뿌리를 공유하는 튀르키예는 투르크권 통합을 시도했고 투르크국가기구(OTS)라는 지역기구로 발전시켰다. 정상회의를 비롯한 다양한 소통채널이 제도화됐다. 산하기구인 투르크문화기구를 통해 동질성 강화도 도모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유엔 산하 ‘중앙아시아 분쟁예방 지역센터’를 유치했다. 여러 국가를 통과하는 아무다리아 강을 둘러싼 물 분쟁을 비롯해 역내 국가들의 첨예한 관심사를 논의하는 장(場)이다.
유라시아 지정학은 투르크 통합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러시아의 정치·군사적 영향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중국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투르크 통합과 상충된다. 투르크권 내에도 구심점이 없다. 독립 초기에는 역외국가 튀르키예가 통합을 주도했으나 역량 부족과 자국 우선으로 형제국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부존자원에 힘입어 성장한 카자흐스탄이 구심점이 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아직 관심과 열정이 충분치 않다.
투르크 5개국의 소련이 물려준 유산, 지배엘리트의 이해관계, 운신의 한계를 설정하는 지정학 등은 북한을 둘러싼 환경과 비슷하다. 독립 이후 선택한 정치·경제적 행보와 진전사항은 북한이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를 설계하는데 많은 참고가 된다. 한국으로서는 동질성과 유대감 증진, 새로운 소통채널의 발굴, 지정학적 장애요인 극복 등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필요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역량과 의지도 필요하다.
남북, 투르크 기구 동반 참여 시도 어떨까
투르크와 역사·문화적 인연이 있는 한국이 북한과 함께 투르크국가기구 또는 투르크문화기구에 옵저버 참여를 시도하는 것은 어떨까. 사회주의 우방이었던 투르크 5개국은 북한에게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유엔 산하 ‘동아시아 분쟁예방 지역센터’ 개설도 추진해볼 수 있다. 제주도에 유치하면 더욱 좋다. 동아시아 분쟁을 논의하는 장에서 남북한 소통의 기회가 가능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한반도 주변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남북관계 진전에 우호적 여건도 조성해야 한다. 1990년 독일 통일을 주도한 서독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실천했을 것이다.
정태인 전 투르크메니스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