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이중구조
“조선업 발전, 산업·노동이 균형 맞춰 나갈 때 가능”
원·하청 상생협약 1년, 하청임금 7.5% 올라 … “기성금 결정기준·다단계 하도급 축소 ‘상생협’에선 한계”, 노동계 “생색내기”
세계 1위로 급부상했던 한국의 조선업은 2010년대 중반 수주 감소와 고유가로 위기를 맞았다. 조선사들은 대량 구조조정을 감행했고 20만명 노동자 중 절반 이상이 조선소를 떠나야 했다. 긴 불황기를 지나 수주가 확대되면서 심각한 인력난 겪고 있지만 낮은 임금, 고위험 노동 탓에 조선소를 떠난 국내 숙련 노동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신규 노동자들도 외면하고 있다.
2022년 7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이 조선업 불황기에 삭감됐던 임금의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벌인 51일간 은 조선업 이중구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절규는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현실을 강력하게 전달했다.
우리나라 조선업은 다단계 하도급에 의존한 생산구조다. 원청 소속 정규직 노동자, 원청으로부터 하도급을 받는 1차 사내하청업체 소속 상용직 노동자(본공), 1차 사내하청업체로부터 재하도급 받는 물량팀으로 이뤄진다. 숙련된 하청노동자의 월급이 정규직 생산직의 50~60%에 불과한 최저임금 수준이다.
지난해 2월 정부와 조선 5개사 원·하청업체들은 ‘조선업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했다. 지난 25일에는 ‘조선업 상생협약의 중간 점검 및 향후 과제 모색을 위한 1주년 보고회’가 있었다.
지난해 초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한 뒤 하청노동자의 임금상승률이 예년보다 소폭 오르고 인력난은 일부 완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원청업체가 하청업체에게 지급하는 기성금 결정 기준 투명화, 다단계 하도급 최소화, 내국인 숙련인력 확보 등은 원·하청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구조적인 사안으로 ‘조선업 원·하청 상생협의체’ 수준의 논의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라는 지적이다. 노동계는 저임금 구조와 다단계 하도급은 여전하다며 “생색내기”라고 비판했다.
고용노동부는 25일 경기 성남시 삼성중공업 연구개발(R&D) 센터에서 ‘조선업 상생협약의 중간 점검 및 향후 과제 모색을 위한 1주년 보고회’를 열었다.
이번 보고회에는 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 조선 5사 원·하청 대표와 상생협의체 전문가들이 그간의 성과를 평가하고 앞으로 추진할 과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대우조선 하청노조 파업, 노동현실 조명 = 2022년 7월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을 계기로 조선업 이중구조 문제가 부각됐다. 이에 정부는 그 해 10월 ‘조선업 격차해소 및 구조개선 대책’을 발표한 데 이어 11월 ‘조선업 원·하청 상생협의체’(상생협의체)를 발족했다. 상생협의체는 4개월 논의 끝에 지난해 2월 27일 ‘조선업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등 근로조건에서 큰 차이가 발생해 노동시장이 사실상 2개로 나뉜 것을 말한다.
상생협약에는 원·하청 상생을 위한 자발적 협력에 기초해 원청은 적정 기성금을 지급하고 하청은 임금인상률을 높임으로써 원·하청 간 보상수준의 격차를 최소화 등 27개의 실천과제를 합의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당시 조선업은 긴 불황기를 지나 수주 확대라는 성과에도 현장 근로자들의 근로여건이 나아지지 않은 상태였다”며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은 조선업의 생존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 원·하청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였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상생협약은 법적 강제나 재정투입만으로는 이중구조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에 따라 원·하청이 자율적으로 상생·연대해 해법을 마련하고, 정부는 이행과 실천을 적극 지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현장에서 구현된 첫 사례”라고 평가한 바 있다.
상생협의체 위원으로도 참여한 박종식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는 이날 보고회에서 지난 1년간의 이행 상황을 설명했다.
원청사들은 1인당 월평균 기성금액을 2022년 520만원에서 580만원으로 인상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하청노동자 임금이 7.51% 인상됐다. 2021년 5.36%, 2022년 6.02%와 비교해 소폭 올랐다.
조선 5사의 공동근로복지기금출연금도 10억원에서 20억원으로 확대하고 의료비나 혹서기·방한용품 지원, 체육·문화활동 지원금 등을 신설했다. 학자금 지원 대상 및 지원금액도 확대했다. 원청의 성과공유으로 하청노동자 4만여명에게 성과인센티브로 760억원을 지급했다.
◆에스크로 제도 올 상반기 조선 5개사 도입 = 임금체불 방지를 위해 2016년부터 한화오션만 시행 중이던 에스크로 결제제도(노무비 직접지급 제도)을 나머지 조선 4사로 확대했다. HD현대중공업은 이달 전면 도입했다. 현대삼호중공업은 4월, 현대미포조선은 5월, 삼성중공업은 상반기 중 전면 도입한다.
에스크로 결제제도는 은행 등 제3자 감시 하에 묶여진 계좌로, 원청이 하청에 기성금 지급시 인건비 항목을 에스크로 계좌에 이체하고 하청이 종사자에게 임금 지급시 원청의 확인을 거쳐 지급하는 방식이다.
인력난도 완화돼 지난해 말 기준 조선 5사 원·하청 종사자는 2022년 7만명에서 1만4812명(21.3%) 증가했다. 증가한 종사자의 90%(1만3604명)는 하청노동자였다. 원청노동자는 1208명 늘었다.
정부가 인력난 완화를 위해 조선업 전용 고용허가제(E-9) 쿼터제를 신설해 5000명의 외국인력을 투입하고 일자리 도약 장려금, 재취업 지원금 등으로 인력이 유입됐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는 “상생협의체가 일회성 협약을 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1년 동안 원청과 정부가 협약내용을 책임있게 이행하도록 했다”면서 “이벤트성 협약 체결이 많았던 이전 사례와 비교해보면 이례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배규식 전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상임위원도 “오랫동안 축적된 문제를 1년 안에 해결하기는 어려운 만큼 노력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원·하청 대표들은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과 협력을 약속했다.
최성안 삼성중공업 대표는 “조선 5사는 협력사와 성과급을 나누고 복지 확대, 근로자 목돈 마련 지원 등 협력사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며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개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무덕 현대중공업 사내협력사 대표도 “상생협약으로 소속 근로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고 생산인력 부족이 일정 부분 해소됐다”며 “협력사도 근로자의 숙련 향상을 위해 노력할 예정인 만큼 원청과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바란다”고 말했다.
◆본공이 일당 높은 물량팀으로 옮기기도 = 하지만 상생협약체가 원·하청 간 이중구조를 심화시키는 다단계 하도급(물량팀)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정 교수는 “조선업의 구조적인 문제였던 다단계 하도급을 최소화하기로 약속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없었다”면서 “오히려 처우가 낮은 본공(1차 하청노동자)이 일당이 높은 물량팀으로 이전하는 사례가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상생협의체 초기 논의과정에서 노조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으나 원·하청 사용자측이 부담스러워하면서 노조가 참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기성금 기준이나 물량팀 최소화, 숙련에 대한 보상 등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구조적인 사안들은 상생협의체 수준의 논의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임을 확인했다”면서 “상생협의체의 성과와 한계를 디딤돌 삼아 풀지 못한 구조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노·사·정이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업의 발전은 산업·노동이 함께 균형을 맞춰 나갈 때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과제로 △급증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력에 대한 수요 진단, 숙련 향상, 비자 정비 등 정주여건 확보 △하청노동자의 숙련을 반영한 처우개선으로 내국인 숙련노동자 양성 △다단계 하도급인 물량팀을 최소화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 등을 제시했다.
◆상생협의회에 원·하청 노조 참여 배제 = 노동계는 상생협약 이행 평가에 대해 “생색내기”라며 비판했다. 2022년 대우조선해양 파업을 주도했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떠나가게 했던 저임금 구조는 더욱 굳건해졌고 다단계 하도급 고용 확대로 인한 위험의 외주화는 더욱 심각해졌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하청노동자 임금이 7.5% 상승했다고 발표에 대해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시급 1만원 노동자의 임금이 고작 750원 올랐다는 얘기”라며 “이 같은 임금인상으로 하청노동자의 저임금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조선업 하청 노동자의 저임금과 인력난, 다단계 하청 고용 문제와 외주화를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상용직 하청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올리는 것과 다단계 하도급 고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금속노조는 “단체교섭권 등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을 조선소 하청노동자도 실제로 누리고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며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재개정을 통해 노동 3권을 실질적으로 쟁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속노조도 “2월 한화오션에서 2억원, 삼성중공업에서 70억원대 하청노동자 임금체불이 발생했다”며 “하청노동자는 임금체불에 아비규환인데 정부가 상생이라며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병조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노조도 함께 조선업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협약을 만들고 이행하는데 참여했으면 더 좋은 성과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부는 당시 상생협약을 체결하면서 상생협의체를 노조가 참여하는 공동협의회로 발전킨다고 밝혔지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조선업 상생협약은 지금 구체적인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며 “아직 최종적으로 목표했던 결과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상생협약의 효과를 부정하기보다 ‘우공이산’(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 자세로 부족한 부분은 계속 실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앞으로 공정하고 투명한 기성금 결정 방식 정립, 원·하청 간 보상 격차 축소, 재하도급 최소화 등 주요 과제에 대해서도 원·하청 등과 지속 논의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