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애널리스트, 인공지능이 속속 대체
저연차 고된 업무, AI 도구로 수초 만에 해결 … 뉴욕타임스 “월가 인공지능 시대 성큼”
명성과 보수를 약속하며 매년 수천명의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투자은행업계에서 이러한 고된 업무는 오랫동안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11일 “새로운 데이터를 생산하고 분석하는 능력으로 많은 산업을 뒤흔들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월가에 상륙하고 있다”며 “오랫동안 문화적 변화에 단련된 투자은행들은 새로운 인공지능 기술이 어떻게 노동자계층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대체할 수 있는지 실험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NYT에 따르면 당장 가장 위험에 처한 부문은 합병과 공모, 채권거래 등 기업금융의 구성요소를 배우기 위해 끝없이 시간을 투자하는 투자은행업계 최하위직급 애널리스트들이다. 이제 인공지능은 이러한 업무의 상당 부분을 훨씬 적은 노력으로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행동과학연구소 책임자로, 주요 은행들의 인공지능 실험을 자문하는 줄리아 다르는 “애널리스트 업무구조는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제 피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하고 있다. ‘애널리스트의 필요성이 줄어드는가’이다”라고 말했다.
월가의 주요 은행들은 현재 수시간 또는 주말 내내 걸리는 작업을 몇초 만에 수행하는 인공지능 도구를 테스트하면서 그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은행들 내부에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코드명으로 배포되고 있는 이 소프트웨어는 월가 경력의 판도를 바꿀 뿐만 아니라 수천명의 대졸 신입사원을 채용할 필요성을 근본적으로 없앨 가능성이 높다.
NYT가 취재한 여러 관계자들에 따르면 골드만삭스와 모간스탠리 및 기타 은행들의 최고경영진은 신입 애널리스트 채용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 논의중이다. 이들 은행은 투자업무 주니어 애널리스트의 채용을 2/3까지 줄이고 채용한 애널리스트의 급여를 삭감하는 내용을 고려하고 있다.
도이체방크의 기술·데이터 혁신부문 최고전략책임자인 크리스토프 라벤세이프너는 “쉽게 생각하면 후배들을 인공지능 도구로 대체하는 것”이라면서도 “인간의 개입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와 모간스탠리, 도이체방크 등의 대표자들은 구체적인 일자리 변화에 대해 언급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컨설팅업체 ‘액센츄어’는 인공지능이 은행업계 전체에서 은행직원 근무시간의 거의 3/4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골드만삭스 대변인 닉 카카테라는 “인공지능 기술을 실험하고 있다”면서도 “단기적으로는 신입 애널리스트 직급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JP모간체이스 최고경영자인 제이미 다이먼은 최근 연례주주서한에서 “인공지능이 특정 직종이나 역할을 줄일 수 있다”며 “JP모간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인공지능 기술”이라고 말했다. 다이먼은 인공지능을 인쇄기나 증기기관 전기 컴퓨터 인터넷 등의 혁신에 빗대기도 했다.
다이먼은 지난 2월 말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히 지나쳐가는 유행이 아니다. 2000년대 초 닷컴버블은 과장이었다. 하지만 AI는 과장이 아닌 현실”이라며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는 시점은 서로 다르지만 향후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JP모간도 인공지능 기술활용 능력을 보유하기 위한 준비를 착착 해왔다. 다이먼은 “실제로 지난해 최고 데이터·분석책임자라는 새 직책을 신설해 부분적으로 인공지능을 다루고 있다”면서 “사내 기술기업들이 출시한 거대 언어모델(LLM)을 연구하는 직원이 200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투자은행 직원 3/4 대체할 수도
투자은행업계는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투자은행은 일반적으로 2년 단위 애널리스트 계약을 통해 젊은 인재를 채용한다. 관련 학부와 MBA 과정 출신의 20대 수만명이 각 주요 은행의 200여개 일자리에 지원한다. 통상 급여는 연말보너스를 제외하고 최소 10만달러(약 1억3600만원)부터 시작된다.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면 어소시에이트 디렉터 매니징디렉터 등으로 직급을 올릴 수 있다. 소수의 인재들은 부서를 운영하는 자리까지 올라간다. 고된 일이지만 시니어뱅커의 삶은 화려해 보인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고객을 유치하고 거액의 기업 인수합병(M&A) 거래를 진행한다.
블룸버그통신의 마이클 블룸버그와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츠먼 등도 2년간의 애널리스트 프로그램을 통과해 억만장자가 된 케이스다. 이들을 롤모델로 삼아 많은 이들이 투자은행에서 경력을 시작하지만, 대다수는 애널리스트 프로그램 2년이 끝나기 전이나 후에 퇴사하는 게 현실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낮은 연차 은행원들 사이에서는 ‘컴퓨터 화면에 뜬 문서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커서를 드래그하는 일이 가장 흔한 업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2년 전 투자은행업계를 떠난 전직 애널리스트 게이브리얼 스텐걸은 “이는 100% 지루하고 지루한 일”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회계법인 딜로이트의 은행부문 선임연구원인 발 스리니바스는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다른 형식으로 바꾸는 작업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투자은행 애널리스트인 그레고리 라킨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술은 마이크로소프트(MS)나 구글처럼 거대 기술기업뿐 아니라 월가 대형 투자은행들 내에서도 내전을 일으킬 것”이라며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은행원이 아닌, 그 도구를 프로그래밍하는 기술직들에게 힘이 쏠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JP모간 투자은행부문 공동책임자인 제이 호린은 “애널리스트가 맡으면 10시간이 걸리는 작업을 인공지능을 통해 10초 만에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규모 언어모델과 챗GPT 같은 질의응답 봇을 포함한 인공지능 시스템은 정보를 빠르게 취합하고 작업을 자동화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산업계에서 인공지능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도이체방크는 자체적인 인공지능 도구에 방대한 양의 금융데이터를 업로드해 상장기업과 관련한 고객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답변하는 한편, 금융시장 움직임에 대한 요약문서를 작성해 고객에게 제공하면서 수익모델을 창출하고 있다.
JP모간의 호린은 “인공지능을 활용해 채권발행에 적합한 기업고객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채권발행 업무는 고객기업들에게 보통 수백만달러를 청구할 수 있는 투자은행들의 필수사업이다.
은행업계도 기술직에 힘 쏠려
골드만삭스는 1000명의 개발자들에게 ‘말뭉치’ 정보 또는 수천곳의 출처에서 수집한 방대한 양의 텍스트와 데이터를 프레젠테이션으로 신속히 변환할 수 있는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라는 업무를 맡겼다. 골드만삭스의 한 임원은 이를 ‘라이트형제의 첫 비행기 시승’에 비유했다. 즉 회사의 미래를 바꿀 만한 변화라는 것이다.
이는 투자은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BNY멜론은행의 최고경영자 로빈 빈스는 최근 실적발표에서 “인공지능이 밤새 경제와 금융 관련 데이터를 읽고 분석 초안서를 작성할 수 있기 때문에 리서치 애널리스트들이 평소보다 2시간 늦게 일어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모간스탠리의 기술책임자인 마이클 피지는 올해 1월 열린 비공개회의에서 직원들에게 “우리가 하는 모든 영역에 인공지능을 도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수천명의 직원을 고용해 부유한 고객을 대상으로 적절한 투자 포트폴리오를 결정하는 자산관리업무도 포함된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최고경영자 브라이언 모이니한은 지난해 이미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고용인원을 줄일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모간스탠리는 월가 주요 금융사 가운데 처음으로 오픈AI의 챗GPT를 기반으로 한 직원용 프로그램을 선보인 바 있다.
골드만삭스가 개발중인 인공지능 도구 중에는 긴 파워포인트 문서를 모든 상장기업에 필요한 기업공개 서류인 ‘S-1’로 변환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이 소프트웨어는 변환작업을 완료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이같은 인공지능 도구 중 상당수는 아직 테스트 단계에 있다. 실제 업무에 광범위하게 적용하려면 금융당국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월가를 뒤흔들 인공지능 시대는 이미 성큼 다가왔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