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 남은 과제 ⑥ 외면받는 국민 목소리
청원 82% ‘폐기’ 임박…제도 한계 악용해 ‘무기한 심사’
21대 들어 채택 청원 단 한 개도 없어 … 청원수 감소세
입법조사처 “심사기간 연장, 위원회 의결만으로 가능” 지적
참여연대, ‘헌법보장 청원권 침해’ 이유로 헌법소원 청구
국민들이 국회에 내놓은 청원 156건이 폐기 위기에 놓였다. 전체 청원이 80%가 넘는 규모다. 표면적으로는 ‘임기말 폐기’ 규정 탓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청원 심사 외면’에 따른 결과다.
23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 들어 189건의 청원이 들어왔고 이 중에서 32건이 본회의에 부의하지 않기로 하는 ‘본회의 불부의’였고 1건이 철회됐다. 33건이 처리된 셈이다. 156건은 계류 중이다. 다음달 29일에는 21대 국회가 끝나면서 폐기돼 폐기율이 82.5%에 달할 전망이다. 전체 청원에서 폐기된 비율은 매년 뛰어오르고 있다. 13대 국회에서는 폐기율이 35.4%였으나 14대와 16대엔 57.1%, 55.7%였고 15대엔 66.7%를 기록했다. 17대부터는 70%대를 넘어섰고 20대에 80.2%로 10개 중 2개만 처리하고는 모두 폐기시켰다.
채택된 청원의 규모도 13대와 14대엔 각각 13개, 11개로 두 자릿수지만 15대부터는 2~4개 사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21대엔 채택된 청원이 단 한 개도 없다.
청원이 국회의원들에 의해 찬밥신세를 면치 못함에 따라 청원 건수도 갈수록 줄었다, 13대 503건에서 16대엔 765건까지 증가했지만 곧바로 급감해 17대엔 432건, 18대엔 272건으로 줄어들더니 21대는 200건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청원 심사가 무기한 연장이 가능하고 이를 국회의원들이 악용하면서 청원 청구자들의 효용성을 떨어뜨리고 국회의원들의 심사 유인을 축소시킨다는 문제점이 지적받고 있다.
국회법은 청원심사를 회부된 날부터 90일 이내에 마치도록 하면서도 60일 범위에서 한차례만 국회의장에게 심사기간 연장을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예외가 있다. ‘장기간 심사를 요하는 청원’은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상임위 의결로 심사기간을 추가 연장할 수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장기간 심사가 필요한 경우나 심사 연장을 요청할 수 있는 특별한 사유 등 각 요건이 구체화하고 있지 않아 사실상 ‘위원회 의결’만 있으면 국회의원 임기만료일까지 심사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의원들 사이에서도 제기됐다. 계류돼 있는 8개의 국회법 개정안을 보면 심사기간 단축, 추가연장 제한, 추가연장 근거 삭제나 1회 이상 심사한 청원만 추가연장 허용 등을 담고 있다.
입법조사처는 “심사기간 단축 또는 추가연장 제한은 청원 심사·처리의 적시성을 높여 국민동의청원제도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국회의 인적·물적 자원은 유한하고 ‘신속처리대상안건’의 위원회 심사기간이 ‘최장 180일’인 점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1회 이상 심사한 청원에 한정하여 90일의 범위에서 심사기간의 추가연장을 한 차례만 허용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의 ‘청원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유권자인 국민들의 청원을 제대로 챙겨 심사하려는 의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청원 소위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임위도 있는 데다 청원소위가 있다 하더라도 거의 열리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렵게 청원할 수 있는 문턱을 넘어서도 국회의원들이 관심을 두지 않다보니 심사가 이뤄지지 않아 결국 국회 불신이나 혐오만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민선영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간사는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청원을 적극적으로 심사하거나 심사하도록 강제하지 않는 한 임기말폐기를 차단하는 등의 조치는 무의미하다”면서 “국민들이 국회의원 소개나 5만명이상 동의를 얻어 상임위에 올라온 청원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사를 하고 심사되는 회의를 공개해 국민 공론화의 장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참여연대는 지난해 ‘국회가 청원 심사를 무기한 미룰 수 있게 하는 국회법 제125조 제6항과 국회가 적법하게 접수된 청원을 심사하지 않는 심사부작위가 헌법이 보장하는 청원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임을 확인해 달라는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그러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청원권은 국가기관이 청원을 수리할 뿐 아니라 심사하여 그 결과를 통지할 것까지 요구하는 권리”라며 “접수만 받아놓고 심사하지 않거나 심사결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청원인에게 통지하지 않으면 청원권 침해”라고 했다. 이어 “국회법이 정한 원칙적인 심사기간내 심사가 어려워 연장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해도, 연장기간이나 횟수의 제한도 없고 연장사유는 너무 추상적이라 자의적인 기간연장을 방지할 수 없다”며 “청원인 역시 심사기간이 연장될 만한 사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도 없고 이를 다툴 수도 없다보니, 국회의 연장 결정 남발과 청원권 침해를 최소화할 어떤 방법도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러면서 “청원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국회법 개정안도 다수 발의되어 있지만 국회가 그 개정에 전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다보니, 청원권 침해를 다투는 헌법소원심판까지 제기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