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한강의 기적은 끝났는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한국식 발전 모델이 흔들리고 있거나 수명이 다했다는 외신 보도를 최근 자주 접한다. 한때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두 가지 난제를 단기간에 달성해 후발 국가의 롤 모델이 됐던 나라가 이제 단기간에 쇠락한 국가로서 또 하나의 드문 사례를 남길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하곤 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2일 한국 경제 상황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값싼 에너지와 노동력에 의존한 국가 주도 성장모델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보도했다. 국내 언론은 이를 비중 있게 소개하면서 대체로 뼈아픈 지적이라고 논평했다. FT가 꼽은 우리 경제의 위기 요인은 새삼스러울 게 없는 내용이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저출생 고령화 문제, 낮은 노동 생산성, 기반기술 부족 등 그동안 국내에서도 숱하게 지적돼온 것들이다.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부문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 후퇴 또는 기반 약화를 지적하는 외신 보도가 잦다. 지난 10일 프랑스 르몽드는 한국 총선 소식을 전하면서 “독재적 성향의 정부에 의해 민주주의가 약화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바이든-날리면’ 논란과 관련한 MBC 고발, KBS 경영진 교체 등 윤석열정부의 언론자유 침해 사례를 비판했다. 22일 미 국무부가 공개한 연례인권보고서도 ‘김만배 허위 인터뷰’ 의혹 보도를 둘러싼 파장 등을 꼽으며 한국의 언론자유가 한 해 동안 나아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성장 동력 꺼지고 민주주의도 후퇴
윤석열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도 경제 부문과 마찬가지로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달 7일 스웨덴 예테보리대학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가 발간한 연례보고서는 한국을 독재화가 진행 중인 42개국 가운데 하나로까지 분류했다.
이 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자유민주주의지수는 한국이 2021년까지 세계 최상위권인 10위권을 유지했으나 윤석열정부 시기인 2022년 28위, 2023년 47위로 곤두박질했다. 경제와 민주주의, 한국의 두 성공신화가 동반 쇠락하는 모습으로 나라 밖에 비치는 것이 유쾌한 일일 수는 없다. 더욱이 그것이 외국인의 시선만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기존 성장 방식에 갇혀 더 이상 혁신을 만들지 못하고 극심한 저출생 고령화로 국가 소멸 가능성까지 언급되는 판국이다. 근본적인 개혁, 판을 갈아엎는 수준의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얘기다.
지난 4.10총선 결과에 나타난 민심이 바로 이런 요구를 담고 있다고 본다. 야권에 압도적 의석을 준 대신 여권에는 아슬아슬하게 개헌 저지선을 넘는 의석을 부여했다. 야권에 정국을 주도하되 독주할 수는 없게 했다. 경제와 민주화라는 두축에 대해 야권의 정책이 많이 반영되도록 새롭게 판을 짜도록 하면서도 여권의 동의나 협력 없이 밀어붙이는 것은 불가능한 구조다. 야권과 협치하지 않고는 21대 국회 때와 같은 상황이 재현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정부가 대야, 대국회 관계를 그렇게 가져가는 것 또한 어려워졌다. 대통령의 영향력이 약화한 상황에서 8석만 이탈해도 거부권이 무력화되기 때문이다. 한계에 이른 성장 동력과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반전시키기 위한 논의가 22대 국회에서 무성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에서 이미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국회의원 정원을 600명으로 늘려 지역구와 비례대표로 각각 300명씩 뽑되 국회의원에 부여된 각종 특혜를 줄이는 방안이 여러 방면에서 제기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말 많은 현행 1987년 개정 헌법을 전반적으로 손질할 때가 된 만큼 개헌 논의도 당연히 나온다. 윤 대통령이 개헌을 통해서 합헌적으로 임기 1년을 단축하고 보장된 임기 내에서 무리 없이 국정을 운영하는 방안도 제안된 바 있다.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됐다고 본다.
현 상황 타개할 우리 정치의 역동성 기대
윤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이 추진되는 등 정치적 변화가 기대되는 상황이다. 변화 없이는 미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다. FT는 성장 동력이 꺼져가는 한국 상황을 타개할 정치적 리더십을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좌파가 장악한 입법부와 인기 없는 보수 행정부로 양분돼 차기 대선까지 3년 이상 정치적 대립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FT의 전망이 빗나가기를 기대한다. 한국 정치의 역동성을 다시 한번 믿고 싶다.
신동호 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