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외국인대리인 법안 반대 연일 격렬시위
노동절·ADB 총회 맞춰 밤늦게까지 도로점거
친EU 젊은세대 중심, 친러시아 정권에 거부감
러시아 남부와 흑해 동부에 위치한 작은 나라 조지아에서 연일 반정부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현 집권세력이 추진하는 외국인 자금의 국내 유입으로 인한 민간 감시를 강화하는 법안을 반대하는 시위지만 사실상 친러시아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이라는 분석이다.
노동절인 지난 1일(현지시간)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수천명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조지아 내무부 발표에 따르면, 이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60여명이 연행되고 6명의 경찰이 부상을 입었다고 현지 미디어는 전했다. 시위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회가 시작된 3일(현지시간) 이후에도 총회장 주변 등을 중심으로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실제로 ADB 총회와 '아세안+한중일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회의'에 참석하려던 대표단과 기자단을 태운 차량이 시위 영향으로 시내 곳곳에서 우회하는 등 교통체증을 겪기도 했다. 이번 총회에 참석한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과 한국기자단 간담회가 열린 트빌리시 한 한국식당으로 가는 주택가 담벼락에도 시위대의 흔적이 역력했다. 조지아 국기와 유럽연합(EU) 깃발 등 각종 그림과 문자로 시위대의 주장을 담은 낙서가 가득했다.
이번 대규모 시위는 지난달 중순부터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현지 미디어의 보도 내용이다. 현 집권세력인 ‘조지아의 꿈’이 지난달 초 제출한 외국인 투자관련 법안이 핵심 쟁점이다. 법안은 외국으로부터 20% 이상의 자금이 유입된 언론기관을 포함한 비정부기구(NGO) 등은 내부에 ‘외국의 대리인’으로 등록을 의무화하도록 했다. 등록을 하지 않은 단체에 대해서는 벌금을 부과하는 등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법안을 제출한 집권당은 외국자본의 투자과정에서 스파이 등이 침투해 자국의 정치와 경제 등에 악영향을 끼칠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 야당측은 친러시아 정권이 2012년 러시아가 비슷한 법안을 제정해 반체제 인사를 탄압했던 것을 본받아 국내 민주인권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야당과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무난히 통과될 전망이다. 지난 1일 의회 심의에서는 이 법안이 찬성 83표, 반대 23표로 통과됐다. 법안은 3차 심의까지 통과하면 최종 확정된다. 여당인 ‘조지아의 꿈’ 소속 이라클리 코바히제 의원은 이달 중순 최종 표결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 등 외신은 전했다.
이처럼 야당세력 등이 러시아가 활용한 이른바 ‘반스파이법’에 반대하는 데는 조지아 내부의 뿌리깊은 정치·경제적 배경이 있다는 분석이다. 2012년 집권한 ‘조지아의 꿈’이 갈수록 친러시아 노선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친서방 성향 야당이 반대하고, 여기에 반러시아 친유럽연합(EU) 성향 젊은층이 가세해 격렬한 시위의 동력이 형성되고 있다는 평가다.
이번 시위에 참가한 카토 살루크바제씨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우리 부모들이 겪은 소련 정권을 원하지 않는다”며 “모두가 거리로 나와 러시아식 법에 반대하고 유럽 지지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한국 기자단 안내를 맡았던 에카테린 바지카시빌리씨도 “조지아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유럽연합에 가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다”며 “이번 시위는 친러시아 정권에 맞서 친유럽 성향의 젊은이들이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EU는 지난해 조지아를 가입 후보국으로 결정했지만 이번 법안이 통과될 경우 민주적 가치를 확립할 것을 요구하는 EU 헌장 등에 부합하지 않아 가입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와 관련 폰데어 라이언 EU집행위원장은 1일 성명을 발표하고 조지아 정부의 시위대에 대한 폭력집압을 규탄했다. 미국 국무부도 같은날 성명에서 “조지아 정부의 행동은 민주적 가치관과 대립하고, 유럽통합의 길을 위험하게 한다”고 했다.
트빌리시(조지아) =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