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미국식 기술혁신, 필요악인 버블
최근 십수년간 세계 경제에서 가장 약진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지만, 미국식 자본주의가 늘 찬사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경제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과 1980년대의 쌍둥이 적자(재정수지∙경상수지의 동반 적자)로 고전하던 국면에서는 일본식 모델이 각광을 받았다. 하버드대의 에즈라 보겔 교수는 당시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O.1)’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을 칭송했다. 2000년대 초반의 10년은 압도적인 규모와 실용주의로 무장한 중국 경제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국 경제는 한물 간 퇴물처럼 취급받다가 부활하곤 했다. 흥미로운 점은 기술의 거대한 변혁이 있을 때 미국 경제가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1차산업혁명(동력)은 영국에서 발원했지만, 2차산업혁명(전기)과 3차산업혁명(PC와 인터넷), 최근의 4차산업혁명은 미국의 주도하에 전개됐다. 1차산업혁명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일 때 나타났던 일이기 때문에 미국 건국 후의 굵직한 기술 패러다임 변화는 예외 없이 이 나라가 주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국경제 굵직한 기술패러다임 변화 주도하며 성장
재산권에 대한 확고한 보호, 우수한 교육 시스템 등이 혁신을 가능하게 한 인프라로 작용했겠지만 미국의 역동적 금융시장도 기술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과 일본은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이 발달한 국가들이고, 미국은 자본시장 중심의 금융으로 성장해 온 국가다.
은행에 의한 경제적 자원 배분은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뱅커들이 검증되지 않은 신산업에 대출하기는 어렵다. 반면 자본시장은 주식발행을 통해 동업자를 모을 수 있게 해준다. 기업이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움켜쥘 수 있는 주주들은 성공 확률이 낮더라도 기꺼이 재산을 기업에 투자한다. 에디슨이 만든 회사 ‘에디슨 전구’에는 당시 최대 금융자본인 JP모건이 출자자로 참여했고, 아마존과 구글∙엔비디아 등 4차산업혁명을 주도하는 미국의 혁신기업들에게는 나스닥 시장이 자금공급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있다.
한편으론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에서 투자자들의 열광을 부르는 ‘버블’은 필요악이다. 1990년대 말 닷컴버블기를 떠올려 보자. 닷컴버블 붕괴는 투자자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당시 버블의 정점에서 주식을 샀던 이들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손편지 대신 이메일로 소식을 전하고, 인터넷에서 쇼핑을 하고 음악도 듣는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세상을 살고 있으니 닷컴 주식을 사들였던 이들의 꿈은 현실이 됐다.
투자자들에게 비극은 요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인터넷 세상의 주역이 당시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던 기업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인터넷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는 기업은 구글이지만 닷컴버블이 한창이던 때에 구글은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지도 않았다. 투자자들은 당시 야후와 엠파스 라이코스 등에 대해 향후 도래할 인터넷 세상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투영시켰지만 이들은 모두 경쟁에서 도태됐다.
투자자에게 ‘버블은 필요악’이라는 관점 중요
인간의 능력이 아주 뛰어나 안 망하고 성공할 기업으로만 자금이 흘러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선험적으로 이를 알 수는 없다. 새로운 성장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그 산업 전반으로 자금이 투입돼야 한다.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 기업들의 상당수는 도태되지만 살아남은 소수의 기업이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구글도 처음에는 다른 많은 스타트업 기업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닷컴버블이 없었다면 구글도 생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소위 ‘4차산업혁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투자자에게 ‘버블은 필요악’이라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투자가 결과적으로 새로운 성장 산업의 동력이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재산이 불쏘시개로 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