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해킹…허술한 시스템에 ‘늑장 대응’ 비판
혼인증명서 등 1천GB 유출
자체 보안체계 취약점 노출
법원 내부 전산망에서 2년간 1000기가바이트(GB)가 넘는 규모의 자료가 유출됐다. 하지만 대법원의 부실한 대응으로 유출 자료의 0.5%밖에 피해 내역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법원 안팎에서는 허술한 시스템에 늦장 대응이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법원전산망 해킹 및 자료유출 사건’과 관련해 국가정보원, 검찰청과 합동으로 조사·수사를 실시한 결과를 12일 밝혔다.
이에 따르면 북한 소속 ‘라자루스’로 추정되는 해킹조직은 외부 인터넷과 연결되는 접점을 이용해 법원 전산망에 침투, 2021년 6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1014GB 분량의 정보를 빼냈다.
침투 시점은 2021년 1월 7일 이전으로 추정되며 백신에 악성코드가 탐지돼 차단된 것은 작년 2월 9일이다. 최소 2년 이상 법원 전산망이 해킹에 노출된 것이다.
법원 전산망에는 일반 시민은 물론 국내외 기업과 검찰·국가정보원 등 수사기관,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 금융당국 등 각종 기관에서 제출한 수많은 자료가 모여있다.
대법원은 작년 2월 악성코드를 탐지해 차단했음에도 자체 포렌식 능력은 없어 실제 정보가 유출됐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북한 소행으로 의심된다는 외부 보안업체 분석 결과가 있어 국가정보원에 기술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선거관리위원회 해킹 사고 등이 터지면서 국정원의 지원을 받는 데도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은 구체적인 유출 사실을 특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외적으로 알리거나 신고하는 등 후속 절차를 밟지도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후 작년 11월 언론 보도로 유출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법원은 뒤늦게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 신고하고 국정원과 공식 조사에 들어갔다.
경찰은 작년 12월 수사에 착수해 대법원 전산정보센터를 압수수색하는 등 살핀 결과 국내 서버 4대와 해외 서버 4대로 자료가 대량 유출된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난 탓에 대부분의 유출 자료는 서버에서 지워진 상태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이 특정해낸 유출 자료는 4.7GB에 달하는 회생 사건 관련 파일 5171개로 전체 유출 정보의 0.5%에 불과하다. 이 안에는 개인정보가 포함된 자필진술서, 채무증대 및 지급불능 경위서, 혼인관계증명서, 진단서 등이 포함됐다.
경찰청 관계자는 “전산망 침입기간은 지난해 2월까지인데 수사 착수는 지난해 12월 초라 범행이 발생하고 한참 뒤였다”며 “뒤늦게 자료를 찾다 보니 이미 삭제된 부분이 많아서 일부만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앞서 법원행정처는 지난해 2월 사법부 전산망 공격 사태를 인지하고도 수사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자체 보안조치를 취했다. 지난해 11월 말 해킹 사실이 보도되자 12월 초 경찰청·국가정보원·검찰청이 합동조사에 착수했다.
사법부 전산망이 해킹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법부가 독립된 헌법 기관이어서 별도의 전산 관리 및 보안 체계를 사용하는 것이 되레 취약점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워낙 예민한 정보가 모여있는 데다 기관 특성상 독립성이 중요해 국정원·경찰 등 외부 기관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구조인데, 정작 자체 정보보호 시스템은 허술하게 방치했다가 해킹에 노출됐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책 수립에 나섰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대량 정보 유출 사례이므로 법원행정처 차원에서 별도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진행할 예정”이라며 “지속적으로 유출 내역을 확인해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유출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수사는 일단 종결됐지만 이른바 ‘은폐 의혹’에 대한 수사가 전개될 가능성은 남아있다.
시민단체 자유대한호국단은 법원행정처가 유출 사실을 고의로 숨겼다며 김상환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전산 담당자들을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등 혐의로 작년 12월 고발했다. 이 사건은 현재 서울중앙지검에 계류 중이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