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피초 총리 피격 중상
총탄 수발 맞고 응급수술 후 목숨은 건진 듯 … 국제사회 “끔찍한 범죄” 규탄
슬로바키아 정부에 따르면 총격 사건은 수도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비초 총리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이날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총격을 받았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에는 경호요원이 총을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를 경찰이 제압하는 장면이 담겼다. 피초 총리는 당초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용의자가 5발 정도를 발사했고, 이 중 3발 이상이 비초 총리 복부 등에 맞았다.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겨진 피초 총리는 수시간 응급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술 경과에 대해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영국 BBC 방송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다”라며 “매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수술은 잘 진행됐고 결국 살아남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총리실은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독하다고만 밝혔다.
슬로바키아 경찰은 용의자를 현장에서 체포한 뒤 수사를 벌이고 있다. 용의자는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전해졌으며 그가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이라는 보도도 있다. 슬로바키아 방송사들은 그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영상녹화분을 입수해 보도하기도 했다.
슬로바키아 총리실은 “피초 총리를 대상으로 삼은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마투스 수타이 에스토크 슬로바키아 내무장관은 “이 암살 시도는 정치적 동기가 있고 용의자는 지난달 선거 직후 범행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이는 피초 총리 진영의 승리로 돌아간 4월 대통령 선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피초 총리는 2006~2010년 첫 번째 임기에 이어 2012~2018년 연속 집권하는 등 모두 세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지난해 10월 치러진 총선에서 민족주의, 관대한 복지 프로그램 등을 공약으로 내걸어 승리했다. 특히 그는 선거기간 중에 펼친 캠페인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슬로바키아 국민들의 친러시아 성향을 등에 업고 서방의 기존 노선과 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고, 친러시아 지도자인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과 동조하는 노선을 취하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배경이 이번 총격사건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슬로바키아 의회는 이날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해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휴회한다고 밝혔다. 주자나 카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공격을 규탄한다”며 피초 총리의 빠른 회복을 기원한다고 성명을 냈다.
국제사회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이번 사건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이 끔찍한 폭력행위를 규탄한다”고 밝혔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카푸토바 슬로바키아 대통령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이번 총격 사건에 대해 “괴물 같은 범죄”라고 비난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을 통해 “폭력이나 공격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비판했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비겁한 암살 기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폭력이 유럽 정치권에서 용납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 등 각국 정상도 SNS를 통해 잇달아 피초 총리와 연대를 표명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총격 사건에 대해 “수십 년 만에 유럽 지도자에 대한 가장 심각한 공격이었으로 슬로바키아 관리들과 다른 유럽 지도자들로부터 충격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한 뒤 “유럽의 점점 더 양극화되고 악의적인 정치적 논쟁이 폭력으로 변했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고 전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