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야후 사태로 본 디지털후진국 일본
현지 언론 “디지털 소작농” 개탄 … 빅테크 데이터센터 유치 등 AI로 역전 노려
이데자와 다케시 라인야후 최고경영자는 이달 8일 결산설명회에서 “네이버와 기술적 협력관계에서 독립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1억명 가까운 일본 국민이 사용하는 국민메신저 ‘라인’을 운영하는 기업 CEO의 입에서 한국 기업으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식민통치와 경제적 의존에서 독립하고자 염원했던 우리의 경험으로 보면 격세지감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해 8월 기자회견에서 “우리나라가 두번 다시 ‘디지털 패전’을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일본이 ‘디지털 후진국’이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나라 주민등록증과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해 전 국민에게 발급하고 있는 ‘마이넘버카드’가 의료현장 등에서 제 기능을 못해 혼란이 확산하자 사실상 사과회견을 하면서 한 말이다.
디지털 국제수지 적자 50조원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2023년도 국제수지에 따르면 디지털 관련 적자는 역대 최대인 5조4000억엔(약 48조5000억원)에 달했다. 이러한 규모는 전년 대비 16% 급증한 것으로 2019년에 비해 불과 5년 만에 적자폭이 100% 이상 증가했다. 이는 무역수지 적자(3조5725억엔)와 여행수지 흑자(4조2295억엔)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일본은행은 지난해 8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디지털 관련 국제수지를 △통신·컴퓨터· 정보서비스 △전문·경영컨설팅 서비스 △지적재산권 사용료 등으로 규정했다. 재무성 통계에 따르면, 통신· 컴퓨터·정보서비스(-1조6000억엔)는 클라우드 서비스 등 기업의 디지털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적자다. 전문·경영컨설팅 서비스(-1조7000억엔)도 검색서비스와 SNS 등을 통한 인터넷과 모바일 광고 등이 반영됐다.
전자 대기업 한 간부는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구글이나 메타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의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와타야 겐고 미쓰비시연구소 연구원은 “일본 기업들은 클라우드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크다”며 “생성AI도 서비스를 활용하면 할수록 디지털 적자는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무성 전문가회의 멤버인 카라카마 다이스케 미즈호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디지털 적자가 여행수지 흑자를 집어삼켰다”며 “여행수지라는 육체노동으로 벌어들인 외화를 두뇌노동으로 생기는 디지털 서비스 대가를 지불하는 데 쓰고 있다”고 한탄했다.
기업의 디지털화는 선진국은 물론 신흥국 기업에도 미치지 못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발간한 ‘디지털경제전망보고서 2024’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클라우드 컴퓨팅과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활용도가 37개 회원국 가운데 대부분 30위권 밖인 것으로 집계됐다. 예컨대 △클라우드 컴퓨팅 33위 △사물인터넷 31위 △빅데이터 분석 36위 △인공지능(AI) 35위 등 디지털 관련 모든 분야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이에 따라 일본의 디지털 국가경쟁력도 저조하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IMD)가 발표한 ‘세계 디지털경쟁력 순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일본은 조사대상 64개국 가운데 32위에 머물러 전년보다 3단계 하락했다. 이 순위는 디지털 기술이 기업의 비즈니스와 정부혁신 등에 얼마나 활용되고 있는지 측정해 비교한 수치다. 이 비교지수에는 또 디지털 인적자원 및 훈련 정도, 미래 성장력을 가늠하는 DX와 관련한 사회적준비 정도 등이 포함됐다. 이번 발표에서 미국이 종합 1위를 차지한 가운데 한국은 6위, 중국은 19위를 기록했다.
제조업 성공신화가 디지털 후진국 원인
디지털 관련 각종 국제비교가 말해주듯 일본은 디지털 후진국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올해 초 신년 특집기사에서 일본이 ‘디지털 소작농’으로 전락했다고 개탄했다. 이 신문은 “2001년 기업용 기간정보시스템 등에 사용하는 대형컴퓨터 시장의 40%를 장악했던 일본이 지금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며 “미국과 일본의 명암을 가른 것은 변화의 속도라는 디지털의 본질을 놓쳤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마이클 쿠스만 MIT공대 교수는 이 신문과 인터뷰에서 “미국 기업은 실패를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서비스를 발빠르게 만들어왔다”며 “일본 IT기업은 위탁받은 범위 안에서만 고객 눈치를 보면서 일을 벌였다”고 했다.
일본이 디지털 후진국으로 전락한 데는 역설적으로 제조업의 성공신화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본이 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최고 수준의 제조 강국을 실현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이라는 데 안주해 디지털화에 뒤처졌다는 지적이다. 디지털 전문 매체 ‘클라우드’는 과거 성공경험과 법적 규제 등이 원인이라고 했다. 이 매체는 “일본 기업과 조직을 이끌고 있는 고령의 리더는 지금과 같은 디지털 기술의 보급이 없던 시대에 경쟁 원리를 배웠고 이를 통해 고도성장기를 구가해 온 사람들”이라며 “1990년대 이후 IT를 도입할 기회는 많았지만, 고도성장의 성공을 경험한 이들이 산업구조와 비즈니스 모델의 근본적 변화를 쫓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제국데이터뱅크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일본 기업 경영자의 연령대별 분포를 보면 50대 이상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70대와 80대 이상도 각각 25.2%, 5.0%로 최고경영자 4명 중 1명은 70대 이상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40대 미만은 불과 3.3%에 그친다. 기업 조직을 이끄는 경영자들이 이처럼 과거 제조업의 성공신화에 취해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디지털 분야에서 지출이 늘어도 이를 살려 다른 분야에서 세계시장에 팔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가 있다면 적자는 가치가 있는 투자”라면서도 “(농부가)누구나 생산할 수 있는 곡물만 생산한다면 소작인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지주의 의도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일본이 그렇다”고 개탄했다.
세계 각국과 디지털협정 맺고 빅테크 유치
일본이 디지털에서 뒤졌지만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미중간 대립이 첨예해지고 미국 입장에서 일본의 경제 및 안보상 중요성이 커지면서 기회는 있다는 관측이다. 이러한 글로벌 경제·안보상황의 급변을 간파한 일본정부는 제도와 기구를 정비하고, 미국 빅테크 기업을 적극 유치하면서 AI 등 미래 첨단디지털 분야에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일본은 2022년 ‘경제안전보장법’을 제정해 반도체와 클라우드, 배터리 등 11개 특정주요물자를 지정해 국가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이 법의 목적과 취지에 기초해 일본정부는 반도체 제조기반 정비를 명목으로 TSMC 구마모토 공장을 2년반 만에 완공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예컨대 이번에 문제가 된 라인야후도 특정주요물자의 하나인 ‘클라우드 프로그램’ 한 부문으로 묶여 이미 지난해 사회기반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지정됐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10일 인공지능(AI) 개발용 슈퍼컴퓨터의 정비를 위해 소프트뱅크에 420억엔(약 3700억원)을 보조금 명목으로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라인야후를 네이버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소프트뱅크는 향후 10조엔(약 88조원)을 투입해 AI 분야에서 세계적인 빅테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구상이다.
일본은 또 미일 디지털협정을 비롯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한 10개국과도 디지털협정을 맺는 등 전세계 각국과 디지털동맹을 체결했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디지털 관련 협정이나 동맹에서 뒤처져 있다.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는 “일본은 향후 AI를 중심으로 데이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각국과 디지털 동맹을 맺고 있다”며 “미국 빅테크가 AI 관련 데이터센터를 앞다퉈 설치하는 것도 양국간 디지털협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 빅테크 기업의 일본내 데이터센터 설립 계획이 잇따르고 있다. 아마존과 오라클, 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IT기업이 올해 들어서만 일본에 향후 10년간 4조엔(약 35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생성형 AI에 반드시 필요한 센터를 일본에 세워 중국을 제어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구상과 궤를 같이 한다는 분석이다. 소프트뱅크가 차세대 AI를 선점하기 위해 네이버와 동맹관계를 사실상 정리하려는 듯한 모습도 미국 빅테크 등의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다.
다만 일본 디지털기술이 단기간에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서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이다. 사토 이치로 일본 국립정보학연구소 교수는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라인야후가 기술 혁신을 추진하지만 네이버와 기술력 차이가 아직 커 1년이나 2년으로는 메울 수 없다”며 “자본 관계가 변하더라도 네이버에 의존하는 구도는 한동안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