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네 글자’가 화급한 에너지 정책
우리나라 양대 에너지회사인 한국전력공사(한전)와 한국가스공사의 사장이 최근 약속이나 한 듯 ‘요금인상’을 공개 호소하고 나섰다. 김동철 한전 사장이 지난달 16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최후의 수단으로 최소한의 전기요금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함을 정부 당국에 간곡히 호소드린다”고 했고, 최연혜 가스공사 사장도 22일 언론간담회에서 “현재 미수금(천연가스 수입 대금 중 가스요금으로 회수되지 않은 금액) 규모는 전 직원이 30년간 무보수로 일해도 회수가 불가능하다”며 요금인상이 시급함을 강조했다.
‘최후의 수단’이라며 요금인상 호소한 양대 에너지 기업
가뜩이나 치솟는 물가로 고통을 겪고 있는 다수 국민들에게 두 에너지회사의 요금인상 공세가 달가울 리 없다.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부와 정치권에도 ‘에너지요금 인상’은 입에 올리기도 꺼려지는 금기어다. 지난 4월 총선에서 대파값의 가파른 인상을 놓고 정부책임론이 매섭게 제기됐고 여당 참패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을 만큼 물가관리는 민감한 국정과제다.
더구나 전기와 가스요금은 대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계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크다. 지난 문재인정부가 탈(脫)원전과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로 큰 폭의 전기요금 인상요인이 생겼는데도 인위적 억제를 지속했던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런 문재인정부를 “참 나쁜 정부”라고 비판했고, 취임 이후 ‘전기·가스요금에 원가주의 원칙 확립’을 새로운 에너지정책 방향으로 내세웠지만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가스공사의 경우 현재 요금은 원가보상률이 80%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역마진 구조가 오래 지속된 탓에 올해 1분기 미수금만 13조5000억원에 달했다. 채권 발행 등을 통해 적자를 메울 수밖에 없고, 미수금이 늘어날수록 금융비용 급증이 불가피하다. 가스공사는 빌린 돈의 이자를 갚는 데만 매일 47억원이 나간다고 한다. 한전은 사정이 더 심각하다. 전기요금이 원가를 밑돌아 쌓인 적자가 2021~2023년 동안에만 43조원에 이른다. 작년 말 기준 총부채가 203조원(연결기준)으로 치솟으면서 작년 한해 이자비용으로만 4조5000억원을 썼다.
이런 상황을 마냥 방치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엄청난 속도로 쌓이는 적자를 해결할 ‘요술방망이’가 따로 있을 리 없다. 두 회사가 빚더미에 눌리면서 원활한 에너지 공급을 위해 필요한 인프라 및 설비투자를 제 때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풍력·태양광 같은 친환경 발전을 아무리 늘려봤자 수요처까지 전기를 보낼 송전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중요한 송전망 건설계획이 한전의 자금 부족으로 인해 차질을 빚고 있다.
만성 중증 에너지산업, 대한민국 구성원 모두가 치료에 마음 모아야
한국 에너지산업의 현실을 사람 몸으로 치면 곯을 대로 곯은 만성 중증 환자다. 정부와 정치권, 업계는 물론 국민들까지 대한민국 구성원 모두가 치료에 마음을 모아야 할 상황이다. 제대로 된 치료를 하려면 ‘네 글자’로 된 처방전 몇 가지가 시급하다.
첫째, ‘현실직시’다. 전기와 가스요금을 지금 수준으로 유지해도 정말 괜찮은 건지 철저한 진단과 치열한 토론에 나서야 한다. 한국 가계의 전기요금(㎿h당 달러, 2021년 기준)이 108.4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80.3달러)의 절반 수준이라는데 지속가능한 건지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둘째, ‘수요관리’다. 원가를 밑도는 요금체계가 에너지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는 게 아닌지 정밀한 점검이 필요하다.
셋째, ‘정도정치’다. 문제가 뻔히 보이는데도 당장의 ‘표심’에 매달려 해결을 외면하는 건 책임 있는 정치의 자세가 아니다. 미래세대에 투표권이 없다는 이유로 감당 못할 ‘폭탄’을 눈 질끈 감고 던지고 있는 게 아닌지 제대로 된 성찰이 시급하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지만 진정한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걱정한다”(제임스 클라크)는 경구(驚句)가 절실하게 되새겨진다.
이학영 경제사회연구원 고문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