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없는 여야, ‘견제와 균형’ 무시
야, 법사·운영위원장 ‘독식’ … 윤 대통령, 거부권 ‘남발’
생존위기 직면 윤 대통령·이재명 대표, 관례 파괴 ‘앞장’
여야가 치열한 정쟁 속에서도 파국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지켜왔던 몇 가지 관례가 있다.
법률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정치권이 암묵적으로 지켜왔던 △국회의장과 상임위원장 배분 △대통령 거부권 최소화가 대표적 관례로 꼽힌다. 여야가 관례를 통해 그나마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지켜왔지만, 최근 여야 수장이 생존에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수십 년 관례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모습이다.
민주당 등 야권은 10일 여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본회의를 열어 법사위원장과 운영위원장, 과방위원장 등 11개 상임위원장을 선출했다. 야권은 ‘의석 수’와 ‘국회법’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4년 17대 국회부터 16년 동안 원내 1당이 국회의장을 차지하고 원내 2당은 법사위원장을 챙겨왔다. 과거에는 원내 1당이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독식했지만, 견제와 균형의 정치를 살려보자는 취지로 자리 배분의 관례를 만든 것. 대통령실을 담당하는 운영위원장은 무조건 여당 몫이었다. 국정안정을 위한 고육책으로 인정됐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날 171석을 앞세워 관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총선 민심을 따르겠다” “국회법을 준수하겠다”며 국회의장에 이어 법사위원장·운영위원장을 ‘독식’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를 연출한 것이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이 먼저 ‘거부권 최소화’라는 관례를 깨면서 야당의 ‘독주’를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윤 대통령은 집권 2년 동안 무려 10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총선 민심을 업은 거대야권이 통과시킨 법률을 번번이 돌려보낸 것. 거부권은 삼권분립 정신을 살리기 위해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이지만, 자칫 민심에 역행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최대한 신중하게 행사되는 게 관례였다. 1987년 직선제개헌 이후 대통령들은 거부권 행사를 최소화(노태우 7번, 김영삼 0번, 김대중 0번, 노무현 6번, 이명박 1번, 박근혜 2번, 문재인 0번)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2년 만에 10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한 데 이어 야권이 예고한 ‘특검법 시리즈’에도 거부권으로 맞설 태세다. 야권 입법→대통령 거부권→정국 파행이란 악순환이 반복되는 형국이다. 여야가 앞다퉈 수십 년 관례를 깨는 건 여야 수장이 생존에 급급한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내가 살기 위해 관례 따위는 손쉽게 무시한다는 것. 윤 대통령은 야권의 탄핵 공세에 직면해 있다. ‘릴레이 특검’을 통해 탄핵 명분을 쌓으려는 야권에 맞서기 위해선 거부권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이재명 대표는 사법리스크에 노출돼 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11일 “절체절명의 (사법) 위기에 처한 이 대표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으로 법사위를 이용하겠다는 선언”이라고 비판했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