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에코백과 민주주의 위기

2024-06-13 13:00:15 게재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해외 순방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중앙아시아 3개국이다. 이날 뉴스의 초점은 ‘영업사원 1호’의 순방 목적이나 성과가 아니었다. 김건희 여사가 손에 든 ‘에코백’이었다.

에코백은 명품백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화려한 디자인에 비싼 피혁가방은 허영과 동물학대로 포장돼 있다. 반면 담백하고 값싼 천 가방은 검소와 절제 그리고 동물과 환경보호를 상징한다. 그의 에코백은 ‘바이바이 플라스틱백’이란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멜라티와 이사벨 위즌 자매가 2013년부터 ‘비닐봉지 반대’ 운동을 벌이며 내세운 구호다. 세계적인 휴양지 해변이 비닐 쓰레기로 뒤덮인 실태를 고발하며 벌이는 환경보호운동이다. 김 여사가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 방문 때 위즌 자매를 만나 격려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정상 부인의 외교에 걸맞은 백 선택이겠다.

대중의 시선은 차갑다. 명품백 논란을 덮어보려는 시도로 보는 듯하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같은 날 국민권익위가 김 여사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내렸다. 전원위원회에서 “청탁금지법상 공직자의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어 종결한다”고 의결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즉각 “대통령의 대학 동기 위원장과 검찰 출신 부위원장이 있는 권익위가 영부인 해외순방 출국길에 꽃 길을 깔아줬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에코백’의 본질은 법치 근간 흔든다는 점

에코백으로 다시 소환된 ‘디올백’을 조롱과 비아냥으로 대하는 것은 핵심을 흐릴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디올백이 법치의 근간을 흔든다는 점이다. 법치의 바탕은 신뢰이며, 신뢰는 공정하고 상식적인 법집행으로 얻어진다. 유전(有錢)무죄, 유권(有權)무죄, 유검(有檢)무죄는 법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법가(法家)로서 진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한 상앙은 법치의 기초가 신뢰임을 알았다. 세 길 나무를 저잣거리 남문에 세우고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십 금을 주겠다’고 포고한 배경이다. 아무도 옮기지 않자 오십 금으로 올린다. 어떤 이가 옮기자 즉석에서 오십 금을 줌으로써 신뢰를 얻는다. 이후 태자가 법을 어기자 똑같이 벌하려 한다. 결국 태자 대신 스승의 목을 베지만. 상앙 자신도 법에 따라 거열형에 처해지고, 진나라는 법치를 기반으로 부국강병을 이룬다.

그렇다. 지금 대중은 디올백 문제에서 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던 ‘공정과 상식’을 가늠하고 있다. 법치의 근간이자 검찰의 존재 이유인 공정한 법집행을 지켜보는 거다. 과연 법이 만인에 평등한가, 아니면 고 노회찬 말마따나 만명에게 평등한가 묻는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3일 퇴근길에 “법 앞에 예외도 특혜도 성역도 없다. 수사팀이 재편돼 준비가 됐으니 수사상황과 조사의 필요성을 충분히 검토해 바른 결론을 내리리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지도하겠다”고 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끌면서 눈치를 살피던 사안을 임기만료 코앞에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도록 지도할 수 있을까.

과거 최고 선출권력인 YS와 DJ의 아들들, 노무현과 이명박의 형을 구속하면서 신뢰와 지지를 받았던 검찰이다. 헌데 막상 검찰 출신 대통령 시대에 스스로 신뢰에 흠집을 내고 있지 않나. 혹시 검찰의 신뢰상실과 제 식구 감싸기를 두고 대차대조표를 비교 검토하는 것일까.

어쩌면 불공정한 법집행보다 법의 과잉과 선택적 법적용이 더 문제겠다. 검찰이 행정권력과 사법권력, 나아가 입법권력까지 사실상 장악하면서 민주주의 근간인 삼권분립이 위협받는 상황이다. 특히 여야 정치인들이 검찰의 칼 앞에 속수무책으로 서있는 처지 아닌가. 게다가 여당 국회의원들이 용산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면서 대의기관이 기능의 반쪽을 상실한 상태이다.

정치 위의 법 아닌 법 위의 정치 구현을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과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독재자는 민주주의 제도를 정치 무기로 삼아 마음껏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선출된 독재자는 사법부를 비롯한 중립 기관들을 자신 입맛대로 바꾸거나 무기로 활용한다”고 했다. 독재자를 ‘제왕적 대통령’으로 치환하면 우리 현실과 너무 비슷하지 않나.

그들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해 민주주의를 죽인다는 사실”이라고 갈파했다. 이어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헌법 같은 ‘제도’가 아니라 상호관용이나 제도적 자제와 같은 민주주의 규범”이라고 했다. 거대 야당의 법안 단독처리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쳇바퀴처럼 되풀이되는 우리 정치 상황에 정곡을 찌르는 지적 아닌가.

에코백으로 감추지 못한 디올백이 자칫 법치의 불신을 넘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기제가 될까 걱정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민주주의 제도를 합법적으로 활용’해서 말이다. 22대 선량(選良)은 부디 정치 위에 법이 아니라 법 위에 정치를 구현하기 바란다. 대의민주주의 본령 말이다.

박종권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