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두뼘 물막이판보다 더 중요한 것
초미세공정으로 이뤄지는 첨단반도체 업계는 나노단위 경쟁을 벌인다. 1nm는 10억분 1m다. 챗GPT로 상징되는 AI혁명은 제시어 입력만으로 몇분 만에 영화같은 동영상을 만들어 낸다. 이뿐만 아니다. 이미 기술개발을 마친 도심항공드론은 승객을 태우고 잠실한강공원에서 인천공항까지 20분이면 날아간다.
이만큼 과학기술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한쪽에선 비만 오면 생명을 잃을까 가슴을 졸이는 사람들이 있다. 침수피해를 걱정하는 반지하 가구들이다.
지자체와 언론들은 장마철이 다가오자 물막이판 설치 숫자로 공방을 벌인다. ‘1년 동안 뭐하느라 아직도 미설치 가구가 이렇게 많으냐’라는 언론의 지적에 지자체는 ‘집주인 반대로 설치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노라’고 답답해 한다. 하지만 기자가 찾아간 침수사고 집중 지역 주민들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물막이판이 설치되면 침수 피해를 줄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인명사고를 막을 순 없다는 것이다.
집 구조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서울 지자체들에서 쓰고 있는 물막이판의 평균 높이는 40㎝다. 집중호우가 발생하고 물이 넘치면 나름 기능을 한다. 하지만 인명사고를 막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수십년째 침수지역에 살며 많은 홍수를 경험했다는 관악구 한 주민은 “인명을 살리는 건 결국 사람의 힘”이라고 말했다. 이 주민은 해마다 홍수경보를 주시했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초기 담당 공무원의 연락을 받아 대피를 했단다. 운영하는 부동산을 나서면서는 미리 준비해둔 이동형 물막이판을 점포 주위에 세워뒀고 다음날 나와보면 점포 안엔 빗물이 1㎝도 들어차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주면 장마가 시작된다. 방재전문가들은 지금 시급하게 점검해야 할 것은 저지대 침수위험 가구를 돕기 위해 만든 ‘재해지원조직’이라고 한목소리로 지적한다. 서울시는 지자체들과 함께 ‘동행파트너’라는 이름의 침수우려가구지원 전담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242가구 늘어난 1196가구에 2956명을 매칭했다.
이들의 활동이 중요한 것은 일반적 침수사고와 달리 인명사고를 막는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장마가 코앞인 지금 인명사고를 최소화하려면 물막이판 몇개 더 설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바로 이 조직을 잘 꾸리고 이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일이다.
오세훈 시장은 서울을 명실상부한 세계 5대 도시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들 홍수 때마다 시민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비가 내려 침수피해가 발생하는 건 막을 수 없다. 하지만 2024년, 세계 10대 경제대국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비 때문에 사람이 죽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