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면기 칼럼
장군의 수염과 돌아오지 않는 해병
수염은 남성의 힘과 권위, 기상을 상징한다. 고려사에 기록될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무인 정중부(鄭仲夫)의 수염 역시 이런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1144년 견룡대정(牽龍隊正) 정중부의 그 수염을 문신 김돈중이 고의로 불태워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를 늘씬 패주기는 했지만 정중부는 분을 삭여낼 수가 없었다. 문신 우위가 확고하던 때였던 데다가 김돈중이 당대 권세가 김부식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모멸감을 잊지 못하고 있던 정중부는 1170년 의종의 보현원 행차길에서 수십명의 대소 신료와 환관을 살해한 후 그를 폐하고 명종을 세웠다. 주연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하고 문무 권력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하지 못한 국왕의 무능, 무엇보다 문무의 차별을 방치한 것이 무신정권 100년의 막을 여는 빌미가 되었다.
불행한 군사쿠테타를 경험해 온 한국에서 군의 문민통제는 확고한 사회적 합의 사항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군이 정치 전면에 나서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정부 들어 군이 정치적 이념적 갈등의 장에 자꾸만 소환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할 일이다. 실종자 수색작전 중 순직한 채수근 상병 특검을 둘러싼 논쟁에 휩싸여 있는 해병대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집권세력과 해병의 악연이 처음은 아니다. 대통령실 이전 과정에서 쫓아내다시피 사령관 관사를 비우게 했던 대통령실이 이번에는 이 사건 하나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대통령 격노설, 제3의 인물 개입설 등의 불온한 소문도 그치지 않고 있다. 책임자를 밝혀 처벌하고 유족과 군을 다독이며 마무리하면 될 일을 권력자들이 끼어들어 꼬아버린 탓이다.
국가가 불행한 희생의 진실을 은폐하고 끝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군인은 죽으라면 군말없이 죽어주는 존재”라는 핵심 피의자 임성근 사단장의 황당한 궤변에 자식을 군에 보낸 국민들이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해병의 명예와 사기, 죽이지 말라
22대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 재의결이 추진되고 있다. 여당은 정치공세라고 주장하지만 국민들은 그의 죽음과 사건 수습과정에서 대통령실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는 심증을 굳혀가고 있다. 공수처 수사와 21일 법사위 청문회에서도 관련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권력이 허영에 들떠 순직한 젊은 해병의 명예를 지켜주지 않았다는 것, 진실을 밝히려던 박정훈 해병수사단장을 항명죄로 기소하는 초법적 무리수를 ‘감행’했다는 게 사건의 핵심이다. 항간에는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는 것이 검사식 어법이라는 말이 돈다. 그러나 국민을 피의자처럼 몰아붙이며 강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지배이지 정치가 아니다.
해법은 간단하다. 특검을 통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채 상병의 영혼이 국민 품에서 안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재판 중인 박 대령이 명예로운 해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위기에 부하를 앞세우지 않는다. 전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해병의 정신이라고 한다. 이제라도 누가 왜 이런 해병의 정신을 모독했는지, 하고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군은 명예와 사기를 먹고사는 조직이다. 국가방위에 헌신한다는 긍지가 없는 군은 죽은 군이다. 전쟁 전투는 우수한 무기체계와 유능한 장군, 장병의 사기, 국민적 지지에서 승부가 갈린다. 대통령은 거친 명령자 아닌 냉정한 전략가, 파쟁적 편애 아닌 엄정한 관리자로서 군을 이끌어야 한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병은 지휘관, 지휘관은 통수권자를 기꺼이 따를 수 있지 않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이 정권은 힘없고 백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모욕에 가까울 정도로 냉대해 왔다. 이태원 희생자,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의 경우가 모두 그랬다. 입대 며칠 만에 순직한 12사단 훈련병 영결식날도 대통령은 아무 일도 없는듯 여당의원 만찬에서 술잔을 높이 들었다고 한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는 투다. 국민이 뭐라든 내 갈 길을 가겠다는 투다.
격노와 술은 권력의 절대금기
격노와 술은 합리적 판단을 해치고 아첨을 낳고 부패와 분열을 조장한다. 급변, 전쟁상황에서는 전략적 실패를 불러올 위험이 배가된다. 국정실패는 물론 국가파멸의 화근이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은 이제라도 잦은 술자리와 격노의 습관을 버려야 한다.
군의 현실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각 대학 ROTC 인기가 시들해진 가운데 작년 한해만해도 9500여명의 중간간부가 군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은 병력자원 급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군의 명예와 사기를 어떻게 진작할 것인지, 흩어진 군심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를 말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줄 때다.
6.25 아침, 다시 한번 우리 군과 장군, 모든 병사의 명예가 존중되기를 기대한다, 채 상병 순직은 단순히 한 해병의 문제가 아니다. 한 병사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뭉개려는 듯한 오만, 정중부 수염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 권력의 경박함에 국민들의 실망과 걱정이 쌓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