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슬’처럼 살다 간 문화예술계의 큰 산 김민기

2024-07-23 13:00:24 게재

군사독재에 저항한 예술인 … 1991년 학전 개관, 고김광석·설경구·김윤석·황정민·조승우 등 배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 김민기 학전 대표의 빈소 |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 가수 고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연합뉴스

가수 김민기가 위암 투병 끝에 21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김민기의 조카이자 학전 총무팀장인 김성민씨는 22일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댁에서 요양 중이던 선생님의 건강이 지난 19일부터 조금 안 좋아졌고 20일 오전 응급실을 찾았다”며 “병원에 갔을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아 다음 날 오후 8시 26분에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대학로 소극장 학전 이끈 가수 김민기 별세 |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가 21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2011년 2월 21일 극단 ‘학전’의 창단 20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에서 고인이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압에 맞선 저항의 역사 =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미술에 몰두했던 학생이었으나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한 뒤 가수의 길을 걸었다. 그는 1학년 1학기를 마친 뒤 고등학교 동창 김영세와 포크송 듀오 ‘도비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0년 명동 ‘청개구리의 집’에서 공연을 열며 그를 대표하는 곡 ‘아침이슬’을 작곡했다. 양희은이 노래한 ‘아침이슬’은 대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1987년 민주항쟁 당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아침이슬’을 부르며 저항정신을 되새겼다.

고인의 가수 생활은 외압에 맞선 저항의 역사였다. 1971년 발표한 데뷔 음반 ‘김민기’는 출반 직후 압수당했다. ‘꽃 피우는 아이’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 그의 노래들은 줄줄이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봉제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면서도 노래로 생각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977년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상록수’를 작곡해 발표했고 1984년에는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결성해 음반을 발매했다.

연극에도 활발히 참여했던 고인은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와 이듬해 마당극 ‘아구’ 제작에 참여했다. 1978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시작으로 1983년 연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등을 연출했다.

19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한 뒤로는 공연을 연출하며 스타들을 배출했다. 그곳에서 1000회 이상 라이브 공연을 열며 팬들과 호흡한 고 김광석은 학전이 배출한 최고 스타였다. 권진원 나윤선 윤도현 정재일 등 음악가들이 학전 출신으로 성장했다.

1994년 초연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한국 뮤지컬 역사에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아있다. 김민기는 독일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게 번안해 2023년까지 8000회 이상 공연을 올리며 7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고인은 2008년 ‘지하철 1호선’의 4000번째 공연을 올렸을 당시를 학전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으로 꼽았다.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를 배출하기도 했다.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뮤지컬 ‘의형제’(2000) ‘개똥이’(2006)와 어린이극 ‘우리는 친구다’(2004) ‘고추장 떡볶이’(2008) 등을 연출하며 대학로 공연 문화를 이끌었다. 올해 3월 15일 학전이 개관 33주년 만에 문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연출한 작품은 ‘고추장 떡볶이’가 됐다.

‘의형제’로 2001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분 대상과 연출상을 받았고 ‘지하철 1호선’으로 한국과 독일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정부로부터 괴테 메달을 수상했다.

◆빈소에 추모 행렬 이어져 = 빈소에는 조문객을 받기 시작한 낮 12시 30분께부터 늦은 밤까지 고인을 애도하려는 배우와 동료 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가수 윤상은 “큰 산 같은 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슬프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배우 박원상은 “선생님과 또래인 분들은 강단으로 가셨지만 김민기 선생님은 끝까지 학전을, 대학로를 지켜주셨다”고 애도했다.

고인과 대학시절부터 친분을 나눈 오십년지기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도 빈소를 찾아 명복을 빌었다. 유 교수는 고인에 대해 “겸손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밖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며 “하지만 그가 문화예술을 고집하며 이룩한 것들은 우리의 어마어마한 문화유산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학전 무대를 거쳐 간 가수 이은미 권진원 박학기 장기하 알리 등이 조문했다. 이들은 지난 3월 학전 폐관을 앞두고 ‘학전 어게인 콘서트’ 무대에도 올랐다. 배우 문성근 강신일 이병준 류승범 김희원 김대명, 배성우도 빈소를 찾았다. 공연예술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종교인과 학생 등 각계각층 조문객들의 발길도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정치권에서도 고인을 기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에 “김민기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참 많은 것을 남겨주셨다. 편히 영면하시기를 기원하며 유가족께 위로를 전한다”고 올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는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 날 아침이슬은 세대를 넘어 온 국민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다”며 “국민을 탄압하고 자유를 억압한 정권은 반드시 심판받는다는 사실, 역사는 생생히 증언한다”고 남겼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페이스북에 “우리 시대의 아픔과 기쁨을 노래하고 무대를 만들었던 김민기 선생이 어젯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추모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페이스북에 “김민기 님은 엄혹한 시대에 끝없는 고초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열망과 함께 영원한 청년정신을 심어줬던 분”이라며 “그의 노래와 공연은 역경과 혼돈의 시대를 걷는 민중들에게 희망이었다”고 위로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이미영씨와 슬하 2남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4일 오전 8시다.

김기수 기자·연합뉴스 ks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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