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자율규제’ 정책이 티몬·위메프 사태 키웠다

2024-08-05 13:00:01 게재

정부가 백지화한 온라인플랫폼법 초안에 정산시기 규정

온플법 시행됐다면 플랫폼업체 ‘최대 2개월’내 정산해야

티메프는 소비자 결제 뒤 수개월 정산 미루며 사태 촉발

정부의 ‘플랫폼 자율규제’ 정책이 티몬·위메프(티메프)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왔다. 문재인정부 당시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했던 온라인플래폼법(온플법)이 시행됐다면 티메프와 같은 미정산 사태는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온플법 제정을 다시 추진해, 플랫폼 업체의 규제 사각지대를 메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동원 법무법인 흰뫼 고문은 5일 “당시 온플법 초안은 플랫폼업체가 거래업체에 제때 정산하도록 규정하고, 불공정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면서 “온플법이 시행됐다면 티메프가 정산을 늦춰 자금을 회전하고 모그룹의 이익을 도모하는 전근대적 사태를 막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고문은 2021년 당시 공정위 시장감시총괄과장으로 근무하며 온플법 제정 실무책임을 맡았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티몬·위메프 정산 및 환불 지연 사태’ 관련 긴급 현안 질의에서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왼쪽 첫 번째)이 업무 보고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티메프 사태의 핵심은 = 티메프 사태의 핵심은 정산지연이다. 티메프는 주로 상품권·여행상품 등을 거래하는 플랫폼이다. 소비자들에게 이 상품을 팔고 거래업체인 여행사 등이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한다.

국내 대부분의 플랫폼 업체들은 소비자와 판매자(입점업체)를 연결해 주고 수수료를 받아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가 낸 돈을 일정 기간 맡아 뒀다가 입점업체에 정산하는 PG업도 함께 운영해왔다.

티메프는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소비자의 결제 대금이나 판매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정산대금을 활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대금 정산기한을 최대 70일로 정한 뒤 당월 판매 수익으로 전월 판매 대금을 정산하는 이른바 돌려막기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특히 여행상품 등의 경우 정산기한이 수개월까지 늘어졌다. 여행 상품은 소비자가 상품 결제(예약)를 한 뒤 실제 여행을 갈 때까지의 기간이 다른 상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다. 소비자가 여행 일정보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3~6개월 전에 상품을 결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메프는 여행상품 정산을 판매일 기준이 아니라 출발일 기준으로 헸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티몬·위메프를 통해 ‘12월 출발 상품’을 6월에 예약하고 결제했다면, 여행사가 티몬·위메프로부터 판매 대금을 정산받는 것은 결제 뒤 최장 7~8개월까지 걸릴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티메프의 모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맞으며 문제가 더 커졌다. 특히 티메프사태 발발 2개월 전부터는 정산시기를 더 늦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당국과 업계는 이 과정에서 최대 1조원의 자금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십만명으로 추산되는 이용자들과 티메프와 거래해온 6만곳의 영세자영업자·중소기업이 피해를 볼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29일까지 공식 파악된 티몬과 위메프 미정산 규모만 2100억원이 넘는다. 앞으로 정산기일 거래분을 고려하면 피해 규모는 더 커질 전망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남근 의원이 지난달 5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온라인플랫폼법 발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온플법은 어떤 법 = 온라인플랫폼법은 현재 공정위가 재추진하고 있는 플랫폼법(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과는 다른 법이다. 온플법은 플랫폼업체와 거래업체간의 갑을관계를 규제하는 법이다. 반면 플랫폼법은 초대형플랫폼업체의 중소·신생플랫폼에 대한 횡포를 막기 위한 법률이다.

온플법은 문재인정부 후반기부터 공정위 주도로 추진됐다. 이 법안은 대형 플랫폼업체로부터 소상공인 등 입점업체 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윤석열정부는 법 제정 대신 ‘자율규제’를 내세우면서 온플법은 백지화됐다. 대신 윤석열정부는 플랫폼 업체의 독과점을 막는 플랫폼경쟁법(플랫폼법)을 추진 중이다. 플랫폼과 거래하는 입점업체의 보호를 법령이 아닌 업권 내 ‘자율 규제’에 맡기기로 정책 기조를 잡은 탓이다.

당시 정부가 추진한 온플법 초안에는 온라인 플랫폼 중개서비스의 내용, 기간 및 대가, 정산절차 등에 관한 내용을 표준계약서에 담도록 하고 있다. 또 플랫폼 업체가 입점 업체에 불이익이 되도록 거래 조건을 설정·변경하거나 이행 과정에서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제재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온플법 정부초안 살펴보니 = 내일신문이 입수한 온플법 정부초안에 따르면 제6조에서 ‘플랫폼업체는 거래업체와 계약서를 서면으로 제공할 것’을 의무화했다. 이 계약서에는 △수수료 부과 기준과 절차 △계약해지, 갱신 절차 △환불 규정 △판매대금의 정산 절차, 방식, 시기 △판매과정서 발생한 손해의 분담기준 등 14가지 사항을 의무적으로 기재토록 했다. 또 공정위는 플랫폼업체가 준수해야 할 표준계약서를 제시하도록 했다. 당시 온플법 제정에 관여했던 다른 인사도 “판매대금 정산시기와 관련해 대형유통업체(40일)와 하도급법상 규정(60일) 등을 참고해 변화가 빠른 플랫폼업체 특성에 맞도록 정산시기를 확정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면서 “당시 관련 토론회에서 입점업체나 소상공인연합회로부터 ‘대금정산이 늦어 어려움을 겪는 영세업자들이 많으니 입법에 참고해달라’는 민원을 많이 받은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결국 온플법이 제때 입법되고 시행됐다면 티메프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는 설명인 셈이다.

당시 온플법은 플랫폼(e커머스)업체의 각종 갑질을 규제하는 조항도 있었다. 온플법은 제9조에서 5가지의 구체적인 행위를 금지했다. 여기에는 대금지급을 늦추는 등의 경제상 불이익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공정위가 즉시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법위반 금액의 2배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게 했다. 익명을 요청한 공정위 관계자는 “온플법이 있었다면, 티메프 사태 초기에 소비자나 거래업체들이 정산지연을 공정위에 신고할 수 있었고 즉시 공정위가 개입해 시정명을 내리는 등 사태확산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냐는 아쉬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온플법 재추진 계기될까 = 이 때문에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 온플법을 재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2대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 김남근·오기형·민형배·박주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온라인 플랫폼 중개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안’등 4건이 계류 중이다. 여기에는 △특정 온라인 플랫폼 중개사업자 불공정거래행위 기준 마련 △사업자 사이의 분쟁조정을 위한 온라인 플랫폼 중개거래 분쟁조정협의회 설치 △공정위의 위반행위 조사 및 처리, 서면실태조사 △온라인 플랫폼 이용사업자의 단체 구성 및 거래조건 협의제도 마련 △시장지배적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의 자사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데이터 이동·접근 제한, 최혜대우 요구 등 시장지배적지위 남용 행위 금지 등의 내용이 두루 포함돼 있다.

아울러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사태의 원인이 ‘판매대금 돌려막기’라는데 주목하고 ‘온플법’에 이커머스 회사의 회계에서 운영자금과 판매대금을 분리하는 내용을 추가로 담는다는 방침이다. 조국혁신당 이해민 의원도 온라인플랫폼의 이용약관 신고제를 도입하는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최근 발의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성홍식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