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아파트 지하주차장 전기차 화재 후폭풍
경찰, 화재 원인 감정…정부, 배터리 정보 공개 추진
불안한 시민, 지하주자창 순찰 등 자구책
소방당국, 스프링클러 미작동 원인 규명
잇단 전기차 화재로 국민 불안이 커지면서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이 ‘포비아’(공포증)로 바뀌고 있다. 정부는 국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범정부차원의 종합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사고 원인을 찾기 위한 경찰의 본격적인 정밀감정이 시작됐다.
9일 경찰에 따르면 인천경찰청은 전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처음 불이 난 벤츠 전기차를 대상으로 2차 합동감식을 실시했다.
합동감식팀은 화물차에 실린 전기차를 지게차로 들어 올린 뒤 배터리팩이 든 차체 하부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후 경찰은 화재와 연관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는 배터리팩을 분리했으며 배터리 관리 장치도 확보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정밀감정을 의뢰할 예정이다.
이 장치는 전기차 배터리의 충전과 방전 상태를 관리해 차량 성능을 유지하고, 배터리의 온도나 용량 등 상태도 모니터링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합동감식팀은 지난 5일 1차 감식에서 배터리팩을 분리하려고 했으나 추가 폭발이 우려돼 작업을 보류했었다.
합동감식에는 인천경찰청 과학수사대를 비롯해 국과수, 인천소방본부 화재 조사팀 등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했다.
특히 차량 제조사인 메르세데스-벤츠 독일 본사와 벤츠코리아도 베터리 담당 전문가 등 6명을 감식 현장에 투입했다.
◆국토부, 13일 자동차 업계 의견 청취 = 잇단 전기차 화재로 인한 불안감이 확산되자 정부가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정부는 오는 12일 환경부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소방청 등 관계부처가 참여하는 전기차 화재 관련 회의를 열어 내달 초 전기차 화재 종합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종합대책에는 전기차 화재 예방 방안이 총망라될 전망이다. 특히 국토교통부는 자동차 제조사가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를 차량 제원 안내에 포함해 소비자에게 알리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부는 이를 위해 오는 13일 국내 완성차 제조사와 수입사들이 참석하는 전기차 안전 점검 회의를 열어 배터리 정보 공개와 관련한 입장을 듣는다.
회의에는 현대차그룹, KG모빌리티 등 국내 완성차 제조사와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BMW그룹코리아, 폭스바겐그룹코리아 등 주요 수입차 브랜드 관계자가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기차 제조업체들은 신차를 출시할 때 차량의 크기와 무게, 최대출력, 전비, 배터리 용량 등은 안내한다. 하지만 배터리 제조사나 제품명 등 상세 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이 제조사에 직접 문의해야 하는 상황이다. 일부 제조사는 소비자 문의에도 배터리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 불이 난 메르세데스-벤츠 EQE 차량의 경우 사고 직후 중국 1위 배터리업체인 CATL 제품이 탑재됐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계 10위 업체 파라시스의 제품이 탑재됐다.
◆선진국선 배터리 정보 공개 = 유럽연합(EU)은 오는 2026년부터 전기차 제조사들이 소비자에게 배터리 제조사 정보를 공개하도록 했고, 미국 일부 주도 배터리 정보 제공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국토부는 내년 2월 ‘전기차 배터리 안전성 인증제’를 시행할 예정이다. 또 올해 하반기부터 자동차 안전도 평가에 배터리 안전 기능 관련 항목을 추가한다.
앞서 산업부는 8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전기차 화재 관련 긴급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에는 자동차 업계와 자동차·배터리 전문가, 소방 전문가 등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잇단 전기차 화재로 안전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것을 넘어 전기차에 대한 공포마저 일고 있어서 전기차 안전 상태를 점검하고 국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는 것이 산자부측 설명이다.
정부가 범부처 합동으로 전기차 화재 종합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 업계와 전문가 의견을 전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전기차 지하 주차장 출입 금지도 = 전기차 화재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자구책 마련에 나선 시민들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는 전기차 충전 구역을 중심으로 지하 주차장 순찰 횟수를 늘렸다. 또 지하 주차장 곳곳에 소화기를 추가로 비치하고, 스프링클러와 소화전 등 소방시설 점검도 매일 실시하는 곳도 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주차타워는 최근 ‘전기차, 주차타워 입고 불가. 외부 주차장 이용’이라는 안내문을 붙이고 전기차의 출입을 금지했다.
수도권 한 아파트에서는 입주자대표회의 의결을 통해 전기차의 지하 주차장 출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아파트측은 ‘불이 나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쓴 경우에만 지하 주차장 주차를 허용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청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전기차 화재 72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발생 장소는 주차장(27건)이었다.
주차장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는 2018년 2건, 2020년 6건, 2022년 14건 등 매년 증가 추세다. 지난해 기준 차량 상황별 전기차 화재 집계에서도 ‘주차 중’이 21건으로, ‘운행 중’(34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충전 중’은 13건이었다.
◆자체 점검선 이상 없던 스프링클러 먹통 = 한편 화재 당시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핵심 밸브가 임의로 조작됐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인천소방본부는 지난 1일 전기차 화재가 발생한 서구 청라동 아파트 방재실에서 화재 수신기를 확보해 디지털포렌식을 실시한 결과 아파트 관계자에 의해 특정 밸브 작동이 중단된 점이 확인됐다고 9일 밝혔다.
조사 결과 불이 난 직후 수신기로 화재 신호가 전달됐으나 스프링클러 작동의 핵심 역할을 하는 밸브를 정지시키는 버튼이 조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불이 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는 ‘준비 작동식’으로 2개 이상 센서에 화재가 감지될 경우 배관에 물을 공급해 뿌린다.
스프링클러만 정상 작동했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소방당국의 시각이다.
소방당국 등에 따르면 화재 당시 작동하지 않은 전기차 주변 스프링클러가 두 달 전 아파트 자체 점검 때는 적합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체 점검은 소방시설관리사 등을 통해 1년에 한 번 이상 실시한다. 그 결과는 소방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장세풍 기자 연합뉴스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