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의료사태의 본질과 국가 중심 거버넌스의 재검토

2024-08-14 13:00:02 게재

정부의 의대정원 2000명 증원정책 발표로 촉발된 의료사태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공의들의 사직으로 초래된 대학병원의 의료공백은 장기화되고 있다. 의료현장에서는 전공의 부재와 전문의 감소로 인해 의료역량은 축소되고 의료의 질은 저하하고 있다. 정부가 의대 증원의 명분으로 내세운 필수의료와 지방의료는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그리 머지않아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대대적 붕괴에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이번 의료사태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떠오르게 될 문제는 세계적 우수성이 인정되어 왔던 체계적 의사 양성체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 적지 않은 국민들은 국민과 건강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사명을 저버렸다며 의사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듯하다. 정부도 이러한 국민 감정에 부응해 의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왔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사들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 논란은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에 내재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저 의사들의 행동을 비난하기만 한다면 이번 의료사태가 우리 사회에 보내고 있는 중요한 신호를 놓쳐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의료사태 본질은 국가 거버넌스 문제

이번 의료사태에서 주목해야 할 신호는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집단행동을 하고 의대교수들마저 계속해서 사직하는 근본적 이유다. 이들 의료 엘리트들의 집단행동의 이면에는 (단순히 의대증원이 야기할 의사수 확대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의료생태계를 지배해온 국가 중심 거버넌스에 대한 깊은 환멸이 존재한다.

그간 국가권력은 의료수가를 비정상적 수준으로 통제함으로써 의료시스템의 작동방식을 심각하게 왜곡해왔고, 그 결과 의료생태계는 필수의료를 중심으로 시스템 붕괴의 임계점에 직면해 있었다. 현행 의료수가 수준은 의료보험을 통한 전국민 의료보장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수단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의료생태계를 위기에 빠뜨린 장본인인 국가권력은 문제의 본질을 외부로 드러내고 의료시스템을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문제의 본질을 간단히 덮어버릴 수 있는 의사수 확대라는 대증적 요법을 채택했다. 또한 국가권력이 일련의 강압적 언사와 행정명령, 의사 악마화 시도를 통해 우리의 ‘동료시민’ 의사들의 자존감을 짓밟아버린 것은 불필요하게 의정갈등을 악화시킨 치명적 과오였다. 일부 언론마저 선동적 보도를 통해 국가권력의 포퓰리즘 행각에 동조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처럼 현재와 같은 국가 중심 거버넌스가 지속되는 한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우리 의료 현실에 대해 의료 엘리트들이 좌절해버린 것은 우리 의료생태계의 질적수준을 크게 떨어뜨리는 불가역적 결과를 낳을 것이다.

사실 국가 중심 거버넌스는 의료생태계 외에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생태계 내에서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국가가 공공선(common good)을 위해 모든 것을 주도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치명적 자만’이다. 공공선은 사회생태계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본분을 다할 때 달성될 수 있으며 공공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권력, 즉 정치인과 관료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거버넌스는 사회생태계의 자생적 진화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사회생태계를 국가권력에 예속시켜 버리는 반(反)민주적 부작용을 낳는다. 국가권력이 추구하는 목표지상주의 하에서는 사회생태계가 발산하는 다양한 신호가 소실되어 결국 사회가 국가전체주의의 늪에 함몰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사대부 중심의 성리학적 질서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중심 거버넌스가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전근대적 질서의 변형물로 작동할 위험이 매우 높다.

공공의 이름으로 시민 희생 강요해서야

이번 의료사태에서 드러나듯 정치인과 정부관료가 국가 혹은 공공의 이름으로 시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착오적 행태를 되풀이하는 것은 그들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질서를 구축해 자신들을 거치지 않고는 사회생태계가 작동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지기 권력과 권위를 한층 더 공고화하기 위한 행위다.

21세기 중반을 향해 나아가는 이 시점에 정체에 빠진 우리 사회가 사회경제적으로 비약하기 위해서는 이번 의료사태를 계기로 그간 사회생태계를 지배해온 국가 중심 거버넌스를 전면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