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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기억 상실증’에 걸렸나

2024-08-16 13:00:01 게재

2000년대 초 조기유학 붐이 일었다. 미국이나 동남아 등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어린 학생들이 2만명을 넘어섰다. ‘강남키즈’ ‘캥거루 맘’ ‘펭귄 아빠’ ‘기러기 아빠’와 같은 신조어가 유행했다. 급기야 국립국어원은 ‘2002년 신어’ 보고서에 ‘기러기 아빠’를 신조어로 올렸다. 뼈 빠지게 일해 외국에 달러를 보내는 학부모가 급증했다. 외로운 기러기 아빠의 슬픈 소식도 간간이 언론을 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2005년 1월 9일자 1면과 14, 15면에 ‘고통스러운 선택(A Wrenching Choice)’이란 제목으로 한국의 기러기 가족 실태를 대서특필했다.

다음은 당시 보도 내용이다. “기러기(Gireugi)는 한국의 전통 결혼식에서 평생 반려의 상징이며 먼 거리를 여행하며 새끼들의 먹이를 구해온다. ‘기러기 아빠’들은 패스트푸드로 인한 비만과 외도 같은 문제를 겪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는 예도 있다. 2000년 4400여 명이었던 조기 유학생이 2002년 1만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은 인터넷과 초대형 상가들이 있는 선진국이지만 사회는 왕조시대 교육체제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직업과 사회적 지위, 심지어 결혼까지 시험성적에 따라 결정돼 창조성이나 진취적 기상이 설 자리가 없다.”(워싱턴포스트 기사 중 발췌, 동아일보 2005년 1월 10일자 보도 재인용)

기러기 가족, 지금은 자녀 사교육에 올인

한국의 조기유학생 수는 2005년 2만400명에서 2006년 2만9511명까지 급증했다(한국교육개발원 교육정보센터 자료). 3만명에 육박하는 조기 유학생 중 초등생은 1만2341명, 중학생은 9201명, 고교생은 6126명이었다. 당시 조기유학의 실태는 출세지향적 교육열과 한국 교육의 모순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다.

학부모들은 달러를 외국에 보냈고 우리의 국부(國富)는 유출됐다. 당시 외국어학원을 비롯한 ‘유학 컨설턴트’는 많은 돈을 벌었다. 조기유학 또한 사교육 학원을 통해 이뤄졌다조기유학 붐이 시들해진 이후 국내 사교육은 더 팽창했다. 조기유학에 들던 돈이 국내 사교육에 몰리면서 학원은 신이 났다.

저출생이 심화하면서 ‘온리 원 키즈(only one kids)’에 대한 학부모들의 사교육 투자 욕망은 식지 않았다. 2007년 20조원이었던 사교육비는 2023년 27조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전국의 학원수는 그사이 2만개나 늘어나 8만5000개를 넘어섰다. 그렇다면 정부는 그동안 뭘 했나.

역대 정부의 사교육비 경감 대책은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이다. 역대 정부의 구호를 별도로 거명할 필요도 없이 윤석열정부만 봐도 그렇다. 교육부는 지난해 6월 ‘사교육 카르텔과의 전쟁’을 선포했는데 결과는 거꾸로다.

외려 사교육은 웃고 있다. 킬러문항 배제 논란으로 학원수요가 증가하고, 의대 정원 여파로 ‘초등 의대반’이 등장하고, 6월 모의고사는 역대급 ‘불영어’로 학원은 기사회생했다. 사교육을 잡기는커녕 외려 키우는 게 교육부다.

결국은 입시다. 저출생 시대에도 학부모의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대학이 넘쳐나도 좋은 대학의 진학 문은 여전히 좁다. 그런 단순한 이치를 망각하고 입시를 건드리니 사교육은 살아남는다. 올해 대입도 그렇고, 2028학년도 대입도 그렇고, 그 후의 대입도 결국은 사교육 먹여 살리기 대책이 될 공산이 크다. 밤 10시에 강남과 목동의 학원가만 가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망국적인 현상을 방치하려는가.

‘입시=사교육 팽창’ 교훈 왜 망각하나

사실 학교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치신다. 교육과 학생지도, 행정업무 등 일은 고되다. MZ세대는 교사되기를 꺼린다. 민간기업을 다니는 친구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봉급에 좌절을 느낀다. 그런 정서는 더 심화한다. 우수 인력이 교단을 회피한다. 현직 교사들은 교육부가 입시를 계속 건드리니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정부가 교사를 더 힘들게 만든다.

기러기 아빠를 넘어 초등 의대반까지 생긴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이제는 교육의 틀을 재정립해야 한다.

초중등 교육과 대입은 같은 생명체다. 디지털 교과서를 포함한 교육정책은 선명하고 예측가능한 대입을 전제로 해야 한다. 학원 장사만 도와주는 작금의 교육부는 기억상실증 환자다.

양영유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