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진의 경제학
"도쿄 땅 밑에서 지진나면 1경원 피해"
기반시설 파괴로 공급망·시장기능 붕괴 가능성 … 난카이지진·수도직하지진 공포 확산
“대지진이 일어날 때 징조가 있었습니까. 대지진은 갑자기 습격해옵니다.” 몇년 전 일본 민영방송에서 방영된 드라마 ‘일본 침몰’ 주인공 대사이다. 도쿄를 비롯해 일본열도가 지진과 쓰나미로 침몰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다. 환경부 소속 주인공이 각 부처에서 차출된 공무원과 총리실 직속 대응팀을 꾸려 지진에 맞선다는 줄거리다.
지난 8일 오후, 일본 규슈지역 미야자키현 앞바다에서 규모 7.1 강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최대 50㎝ 정도의 쓰나미가 관측됐지만, 사망자 등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이번 지진이 일본 국민을 긴장시킨 데는 기상청이 ‘난카이 거대지진 임시주의보’를 발령했기 때문이다. 2017년 지진에 대한 경보 또는 주의보 제도를 도입한 이후 처음이어서 충격과 공포는 더 컸다.
경제적 피해 계량화 논란
‘지진의 나라’ 일본에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기억은 끔찍하다. 이 지진으로 일본 정부 공식집계 사망자 1만9729명, 행방불명자 2559명 등 총 2만2288명이 희생됐다. 전파된 주택만 12만1996채 등 100만채 이상의 주택과 건물 등이 파손됐고, 도로와 항만 등이 파괴됐다. 무엇보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은 지진→쓰나미→원전 폭발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사회 재난의 종합판으로 각인됐다. 지진에 의한 인적피해는 재난의 가장 끔찍하고 두려운 존재다. 일본 정치권과 언론이 가장 빈번하게 언급하는 단어가 ‘안전’과 ‘안심’이다. 사람의 신체적 안전과 심리적 안심은 일상생활과 재난 대처에서 첫째 원칙이다. 그나마 인적 피해는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부상자 등의 숫자가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직간접적인 경제적 피해와 파급효과는 특정 기간과 지역, 산업에 국한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계량화에 한계가 있다. 일본에서도 정부와 학계, 언론 등에서 지속적인 연구와 논쟁의 대상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경제적 피해의 범위와 규모 등을 두고 다양한 논쟁이 제기됐다. 정부가 공식적인 피해액으로 집계한 16.9조엔(약 155조원)은 주택과 건물, 공장설비와 인프라 등 눈에 보이는 ‘스톡’(자산) 측면의 집계라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야마자키 마사토 나고야대학 재난연구센터 교수는 스톡뿐만 아니라 플로우(자산이 가져올 미래이익의 현재가치)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마자키 교수는 동일본 대지진 관련 평가보고서에서 “정부의 추산은 향후 복구예산을 상정한 것”이라며 “전국규모의 기업활동 정지와 실업이라는 경제적 혼란을 감안하면 동일본 대지진의 경제적 피해금액으로 적절치 않다”고 했다. 야마자키 교수는 그러면서 “플로우는 기업 영업이익, 가계소득, GDP 등으로 나타난다”며 “이 개념은 간접적 영향도 포착할 수 있어 재해가 불러올 물적 피해를 포괄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미쓰비시종합연구소도 올해 초 발생한 노도반도 지진을 분석해 5월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지진에 따른 경제적 영향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민간주택과 사회인프라 등 고정자산 손실액만 2조엔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지진에 따른 산업적 부가가치 손실 등을 고려하면 추가적으로 1600억엔 수준으로 추산했다. 이 지역은 생산시설 등이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어서 절대적 금액은 비교적 크지 않았다.
동일본 대지진 이전과 이후
일본 정부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가용 정보와 데이터를 모두 동원해 지진에 대한 임시정보시스템을 도입했다. 아울러 경제적 피해를 산출하는 데서 단순한 자산피해가 아니라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감안해 피해규모를 추산했다. 민간 기관에서는 이미 동일본 대지진이 산업과 금융, 고용 등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으로 추산했다. 대지진 직후 도요타와 혼다, 닛산 등 일본 완성차 업체는 최소 보름 이상 일본내 전공장의 생산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부품업체 등 일본 자동차산업은 사실상 마비됐다.
일본경제산업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지진 직후 3개월 동안 자동차산업만 14.1조엔 등 제조업에서 22.3조엔의 생산량 감소를 가져온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 모든 원전의 가동을 중단하면서, 원유와 가스 등 에너지 수입비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대지진을 기점으로 일본의 무역수지가 적자로 전환한 이후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진이 가져온 경제적 파급을 가늠할 수 있다.
동일본 대지진은 금융시장에도 충격을 줬다. 지진 발생 이후 도쿄 증시 닛케이지수는 10% 이상 폭락했다. 다만 외환시장에서 일본 엔화가치는 급등했다. 막대한 지진 피해에 따른 보상금 지급으로 일본 보험회사가 해외에 있는 자산을 처분해 엔화로 환전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엔화가 급등했다는 평가다. 당시 엔달러 환율은 전후 최저인 달러당 76엔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한 정치인이 “수도권이 아닌 동북지역에서 발생해 다행”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주된 피해지역인 미야기현 등 동북지역 4개 광역단체는 인구가 500만명 규모이고, 산업시설도 적어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는 취지였지만 국민정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발언이었다. 그만큼 수도권에서 발생할 지진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수도권 직하지진, 일본침몰 수준
일본 국민은 향후 30년 안에 70~80%의 확률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난카이 거대지진’과 ‘수도직하지진’에 극도의 공포감을 갖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번 미야자키 앞바다 지진으로 예보를 불러온 난카이 거대지진의 경우 자산 피해 50.8조~169.5조엔, 경제활동 마비에 따른 손실 35.1조~50.8조엔 등 총 132.7조~220.3조엔이라는 천문학적 피해를 추산했다. 실질GDP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에 비해 10% 가량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정부는 또 도쿄 도심부 남쪽에서 수도직하지진이 발생할 경우를 상정하고 피해를 추산했다. 지난해 12월 중앙방재회의가 발표한 최신보고서에 따르면, 지진의 진동에 따른 피해와 시가지 화재로 최대 3만3000명이 사망하고, 17만5000채의 건물이 전파되는 등 최대 100만채 가까운 손실을 입을 것으로 예상했다.
전력은 절반 이상의 지역에서 1주일 이상 정전이 지속되고, 통신은 90% 지역에서 1일 이상 통화가 안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밖에 상하수도, 교통, 항만, 에너지 등 도시 기능은 마비될 것으로 예상했다. 경제적 피해는 건물 등 파손에 따른 직접 피해액 47조엔과 생산과 서비스의 중단 등 48조엔, 총 95조엔의 피해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정부 추산도 지나치게 안이하다고 평가했다. 일본 토목학회는 지난 3월 기자회견을 열고, 도쿄에서 지진이 나면 20년에 걸쳐 장기간 1001조엔(약 9210조원)의 피해가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일본 재난 주관방송사인 NHK가 2019년 민간 경제전문가 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수도직하지진이 일어날 경우 제조업의 78.3%가 해외로 점차적인 이전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기업 도산도 증가할 것이라는 답변이 72.3%에 달했다. 특히 외자기업 지점과 사무소의 91%가 철수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토추종합연구소 다케다 쥰 연구원은 “자연재해로 일본의 브랜드 이미지가 추락하면 일본내 자금은 아시아 다른 지역으로 유출될 것”이라고 했다.
도쿄는 시장기능이 사실상 마비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고바야시 신이치로 미쓰비시UFJ리서치앤컨설팅 연구원은 “암시장이 들어서고 가격제도는 붕괴해 아무리 비싸도 사려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일본에서 지진이 미치는 경제적 피해와 파장은 깊고 길게 이어질 수 있다. 당장 정부 재정은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 일본 정부는 동일본 대지진 복구에만 10년간 32조엔을 썼다. 국민 1인당 25만엔에 이르는 규모라고 NHK는 분석했다. 도쿄나 오사카 등 거대도시에서 지진이 발생하면, 그 피해와 정부 재정부담은 천문학적인 수준이 될 전망이다. 산업과 금융 등 일본의 국가경제 전반에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와 전문가의 진단이다.
한편 일본은 지진에 대비한 보험시장 규모도 크다. 일본 민간 보험사가 판매하고 정부가 재보험사 역할을 한다. 현재 보전할 수 있는 규모는 11.7조엔 수준이다. 일본 전국적으로 2022년 기준 35% 가량의 가구가 가입했고, 동일본 대지진 피해를 가장 크게 당한 미야기현이 53.6%로 가장 높다. 오키나와현은 17.9%로 가장 낮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