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고시엔과 광복 80주년
지난주 교토국제중고등학교의 고시엔 우승은 팀코리아의 파리올림픽 선전 못지않은 화제였다. 이 한국계 학교의 우리말 교가가 일본의 대표적 야구대회 결승전 경기장에서, 상대팀의 박수를 받으며 울려 퍼진 사건은 일각의 혐한기류에도 불구하고 울림을 줬다.
교토국제고는 재일교포의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됐지만 이제 한국인보다 일본인 학생 비중이 더 크다고 한다.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거나 야구를 좋아해 입학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관계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 상상을 자극하는 대목이다.
야구광인 윤석열 대통령은 교토국제고 우승에 반가움을 표했다. 광복절을 전후해 친일·역사관 논란이 거센 터라 더욱 각별한 의미였을 것 같다. 대통령실도 이례적으로 보도 참고자료를 냈다. 이 학교가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음을 알리고 “미래 한일 양국 간 교육 교류·협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이 한일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국민은 안다. 문제는 그가 국민의 기억과 상처·의문을 제대로 보듬지 않은 채 ‘가속페달’ 밟기에 급급했다는 점이다.
취임 첫해 광복절만 해도 윤 대통령은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를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이제 함께 힘을 합쳐 나가야 하는 이웃”이라고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러더니 지난해엔 “일본은 이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라며 성큼 나갔다. 올해는 ‘일제’ ‘일본’에 대한 언급 자체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국내여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 해법을 결단한 것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손들어 준 것도 불과 1년 전이다.
속도전 과정에서 깊어진 것은 이해가 아닌 의혹과 오해였다. 윤 대통령의 ‘양보’ 후에도 역사·영토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일본정부는 종전과 다를 바 없이 우리 국민 속을 헤집었지만 대통령실과 우리 정부는 매번 일본측의 입장을 두둔하는 듯한 설명으로 논란을 키웠다.
국내 주요 역사·역사교육 관련 기관 곳곳에 이른바 뉴라이트·극우 성향 인사를 배치해 오던 것이 곪아 터져 사상 초유의 ‘반쪽 광복절’ 행사를 치르기까지 했다. 새 역사교과서 검정결과 발표, 국내 곳곳의 독도 조형물 철거 문제 등 아직 터지지 않은 악재들도 있다.
내년이면 광복 80주년이다. 윤 대통령이 친일논란을 반국가세력에 의한 국론분열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국민의 공감과 이해를 구하는 방법을 다시 돌아봤으면 좋겠다. 한일관계의 미래는 이미 고시엔 구장에서 시작됐을지 모른다.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국민의 기억과 상처까지 신중히 품어안고 하나로 모아 그 미래를 맞이하는 일일 것이다.
이재걸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