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트윈’,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다
이코노미스트지 “자동차·비행기 엔진 등 제조업에서 질병·약물 등 의료부문까지 확산”
수년 뒤 병원을 방문할 땐 환자가 자신의 가상버전을 만나게 될 전망이다. 이른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이라고 불리는 이 가상모델은 의사의 컴퓨터 화면으로 불러올 수 있는 신체모형이다. 최신 생체신호로 업데이트돼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또 개별 환자에 특별히 고안된 의약품과 시술의 문을 열어 회복률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의료뿐 아니다. 디지털 트윈은 곳곳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객기의 제트엔진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지자체가 홍수의 영향에 대응한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시험주행과 충돌을 시뮬레이션해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데 걸리는 기간을 수년 단축할 수 있다. 공장과 회사, 도시 전체를 관리하기 위한 디지털 트윈도 개발되고 있다.
전체 생산공정 시뮬레이션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1(F1) 팀 중 하나인 ‘오라클 레드불 레이싱’은 약 1500명의 직원을 고용해 레이싱카를 제작하고 있다. 레이싱은 몇분의 1초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한 시즌을 치르는 동안 레드불의 경주용차는 수천번의 디자인 변경과 조정을 거치게 된다. 레이스와 레이스 사이 며칠 만에 부품을 설계하고 테스트 배송 장착까지 마쳐야 하는 등 엄청난 속도로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한치의 오차라도 치명적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속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체 생산공정을 시뮬레이션하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문제가 발생하기 전 미리 해결하는 것이다. 바로 디지털 트윈이다.
디지털 트윈이 작동하려면 실제 부품에 의해 차량 상태가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돼야 한다. 이는 거의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는 센서에서 수집한 실시간 정보를 사용해 이뤄진다. 레드불의 경우 각 자동차의 디지털 트윈은 엔진 성능, 타이어 온도, 서스펜션 움직임 등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250개 이상의 센서를 통해 업데이트된다. 부품의 치수를 200만 분의 1m까지 정확히 재는 레이저 스캐너도 있다. 레이스가 끝날 때까지 각 차량이 팀 엔지니어에게 중계하는 무선데이터의 양은 테라바이트 규모다.
디지털 트윈 기술을 공급하는 스웨덴기업 ‘헥사곤(Hexagon)’의 자동차 부문 책임자 이냐치오 덴티치는 “레이싱 트랙은 디지털 트윈을 더 넓은 자동차 산업에 적용하기 위한 실험실 역할을 한다”며 “자동차 설계가 디지털화하고, 시뮬레이터에서 프로토타입 차량을 가상으로 테스트할 수 있게 되면서 일반차량 신규모델의 구상부터 양산까지 걸리는 기간이 약 5년에서 2년 정도로 단축됐다”고 말했다.
비행기 엔진에도 디지털 트윈이 활용된다. 미국은 보유중인 76대 대형 B-52 폭격기의 엔진을 모두 교체해야 한다. 1950년대 냉전시기 제작된 폭격기다. 미 공군은 엔진교체 프로그램을 입찰하면서 종이 설계도를 배제하고 디지털 모델을 필수요건으로 제시했다. 26억달러 규모 입찰에서 영국 엔지니어링기업 롤스로이스가 B-52에 설치된 F130 군용엔진을 복제한 디지털 트윈을 활용해 낙찰 받았다.
롤스로이스는 물론 해당 계약을 놓고 경쟁했던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과 프랫앤휘트니도 엔진의 성능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디지털 트윈을 활용하고 있다. 그동안 항공사들은 항공기용 엔진을 직접 구매하고 유지보수하며 예비부품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이제는 대부분 ‘시간당 전력사용량’이라는 구독모델을 통해 엔진을 임차한다. 이는 엔진이 작동할 때만 제조사에 비용을 지불한다는 의미다.
롤스로이스 수석엔지니어 스티브 그렉슨에 따르면 각 엔진에는 디지털 트윈이 있다. 실제 비행에서 엔진이 작동할 때마다 각종 센서가 데이터를 24시간 개방형 모니터링 센터로 전달해 트윈을 업데이트하고 이상 징후를 확인한다. 그런 다음 AI 기반 알고리즘으로 이상징후를 찾는다.
최근 싱가포르에서 LA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 몇시간 뒤 이상징후를 보였다. 롤스로이스 엔지니어들은 상태 모니터링을 통해 잠재적인 엔진 문제를 감지하고 원인을 파악했다. 엔지니어들은 항공사와 조종사에 연락해 ‘일단 비행을 계속해도 안전하다’고 알렸다. 그 사이 롤스로이스 기술팀은 교체용 엔진과 예비부품을 프랑스에서 공수했다. 문제의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기술팀은 수리를 마쳤다.
항공기는 일정 주기로 엔진을 정비해야 한다. 하지만 각 엔진마다 편차가 크다. 중동과 같은 사막지역의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는 거친 먼지입자를 흡입해 부품을 더 빨리 마모시킨다. 특정 항공편은 더 많은 짐을 싣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가중된다. 그리고 일부 조종사는 다른 조종사보다 스로틀을 더 세게 밟는다. 디지털 트윈은 이러한 점을 고려하기 때문에 각 엔진의 실제 마모상태에 따라 유지보수 일정을 조정할 수 있다. 롤스로이스는 “이를 통해 일부 엔진은 최대 30%까지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제트엔진이나 F1레이싱카처럼 디지털 트윈의 정교한 모니터링을 받는 경우는 아직 많지 않다”며 “하지만 센서가격이 저렴해지고 모델 제작이 쉬워지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휴대폰에서 세탁기에 이르기까지 다른 제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전했다.
디지털 트윈 통합해 가상인체로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의 의료엔지니어인 미셸 오옌은 “최근 수년간 의료 분야만큼 디지털 트윈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곳은 없다”고 말했다. 개인 맞춤형 의료를 향한 노력이 가열차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장기 전체를 안정적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면 질병과 치료약물의 영향도 상세하게 모델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옌 박사는 이 기술을 사용해 임신 중 태반의 발달과 이것이 사산의 위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델링하고 있다. 폐와 신장을 포함한 다른 장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연구들이 진행중이다. 연구자들은 간질발작을 모델링하고 연구하기 위해 인간의 뇌에서 뉴런의 복잡한 상호연결을 시뮬레이션하는 데에도 진전을 이뤘다.
연구자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기관은 분당 최대 100회까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혈액을 온몸으로 보내는 심장이다. 모든 심장은 동일한 물리법칙을 따르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식습관과 생활방식, 나이, 체격 등에 따라 심장조직이 전기신호에 반응해 수축하는 방식과 심방을 통해 혈액이 얼마나 원활하게 흐르는지가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가 신체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 심장병 환자의 회복을 돕는 데 중요하다.
런던 퀸메리대학교의 캐롤라인 로니 박사는 가상모델을 사용해 심방세동 치료법을 찾고 있다. 심방세동은 심장상부의 불규칙한 전기신호에 의해 발생하는 가장 흔한 형태의 심장부정맥으로, 영국에서만 약 140만명이 이를 앓고 있다. 치료하지 않으면 뇌졸중이나 심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현재 심장의 병든 부위를 가열하거나 얼려 작은 흉터를 만든 뒤 잘못된 전기신호를 차단하는 절제술이 주로 사용된다.
로니 박사는 “심장조직의 차이로 인해 환자들이 절제술에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한다”며 “디지털 트윈을 사용해 개별 심장의 세부사항을 재현하고 절제술에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함으로써 맞춤형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캐닝기술의 발전 덕분에 심장의 구조와 구성을 1mm 이내로 복제할 수 있게 됐다. 디지털 트윈을 사용해 수술 전에 절제술과 예상되는 환자반응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또 이론적으로 디지털 트윈은 추가 스캔 없이도 나이에 따른 심장구조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장기의 디지털 트윈을 개별적으로 개발했다가 결합해 한 장기의 출력을 다른 장기의 입력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로니 박사는 ‘의료분야의 디지털 트윈 생태계’라는 유럽 컨소시엄의 일원이다. 서로 다른 장기의 디지털 트윈을 통합해 가상인체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이것이 실현되면 약물효과부터 수술결과까지 모든 것을 보다 안정적으로 모델링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이번달 구체적인 달성방법 등에 대한 설명회를 열 계획이다.
지구를 대상으로 한 유사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영국 헐대학교의 물리지리학자인 토머스 콜타드는 폭우와 폭풍에 대응하는 당국을 돕기 위해 해당지역의 디지털 트윈을 구축하고 있다. 이 트윈은 수문과 방벽이 열리고 닫힐 때 지표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델링한다.
미항공우주국 제트추진연구소의 데이터과학자 토머스 황은 지구 기후의 디지털 트윈을 구축하고 있다. 목표는 실시간 데이터를 사용해 지구온난화가 날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예측을 개선하는 것이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