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예산승인권 사각지대 ④ 부실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국가 정책’이라는 이유로 요구 당일에 ‘예타 면제 확정’
‘국가 정책’ 면제, 지난해 4조2000억원으로 전체의 절반이상 차지해
사업계획 허술→사업 지연→공사비 증가→타당성재검토→추가 지연
국회 예산정책처 “예타면제, 행정부 재량에 좌우 … 제도 근본 훼손 우려”
‘국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받은 사업들이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나면서 ‘예비타당성 면제 사업’의 근본적인 취지를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가 정책’ 프리패스를 활용한 예비타당성 면제 사업들은 실제 집행 과정에서 구체적인 사업계획 부재에 따른 사업비 급증, 사업 지연 등 ‘심사 면제’의 부작용들은 보여온 것으로 나타났다.
2일 정부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나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동안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받은 사업은 총 151개로 총사업비는 96조원 규모이다. 이중 국가재정법에서 제시한 10가지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사유 중 제10호인 ‘지역 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하여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이라는 이유로 면제된 사업이 45개로 전체의 29.8%를 차지했다. 사업비 기준으로는 63조8000억원으로 66.3%에 달했다.
2023년 회계연도만 따지면 25개, 9조3000억원 규모의 예비타당성심사 면제 사업 중 ‘국가 정책’이라는 이유로 면제받은 사업은 20.8%인 4개였고 사업비 기준으로는 4조2546억원으로 56.7%를 차지했다.
◆64건 중 63건이 면제 확정된 이유 = 면제 선정률에서도 10호 사유인 ‘국가 정책’에 의한 사업이 유난히 높았다.
제1호부터 제9호까지의 사유로 예비타당성심사가 면제된 사업은 2014~2022년까지 면제 요구된 326건 중 175건으로 53.7%에 해당했지만 제10호의 경우엔 64건 중 63건인 98.4%였다. 사업비 기준으로 보면 76조8000억원이 요구됐고 99.6%인 76조5000억원 규모의 사업이 면제됐다.
문제는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받아 국회 심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대형 SOC 사업의 상당수가 추진일정이 계획보다 지연되거나 사업비가 크게 늘어난다는 점이다.
부산신항-김해고속도로, 세종-청주고속도로, 울산외곽순환고속도로 사업은 총사업비 증가로 지난해 6월 사업계획 적정성 재검토에 들어가 지난해 예산이 모두 미집행됐다.
새만금 신공항 건설, 충북선 고속화(청주공항~제천), 대구산업선 철도건설, 석문산단 인입철도, 대전도시철도 2호선(트램), 울산병원 신축(울산 산재 전문 공공병원), 영종~신도 평화도로, 평택-오송 복복선화, 옥정-포천 철도건설 사업도 사업비 급증 등의 이유로 “예타 면제 시점과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 기간 등을 고려할 때, 사업기간이 크게 지연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당시에 비해 총사업비가 크게 증가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대전도시철도 2호선(트램) 사업비가 96.4% 늘어나 거의 배로 확대될 전망이다. 영종~신도 평화도로(51.4%), 충북선 고속화(청주공항~제천, 48.8%), 옥정-포천 철도건설(40.9%) 사업의 사업비 증액이 눈에 띄었다. 수산식품 수출단지 조성(20.0%), 대구산업선 철도건설(18.4%), 제2경춘국도(남양주~춘천, 18.6%) 사업도 10~20%의 사업비가 늘어났다.
‘2019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 선정사업’ 19개 중 대부분 사업기간이 지연되거나 총사업비 증가로 인해 사업계획 적정성 재검토 절차가 진행 중이다.
◆악순환의 시작은 ‘구체적인 계획 심사도 없는 면제’ =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없거나 부실한 데도 예비타당성조사가 면제된 데서 부실관리가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사업계획 부실은 사업 과정에서 사업 계획과 총사업비 변경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사업 지연은 공사비 상승을 발생시켜 사업계획 적정성 재검토를 거치면서 사업이 추가로 지연되는 ‘악순환’을 만들어냈다.
국가재정법 제38조는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사업 규모, 사업비 등의 세부 산출근거가 있고 재원조달·운영계획, 정책효과 등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수립된 사업에 한해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예비타당성조사 대상사업과 면제사업 선정에 관한 사항 등을 심의·조정하는 재정사업평가위원회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획재정부 산하의 재정사업평가위원회는 사업계획의 구체성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확정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남부내륙철도(김천~거제) 등 13개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요구는 2019년 1월 29일에 이뤄졌고 재정사업평가위원회의 승인은 하루가 지난 같은 달 30일에 단행됐다. 2020년 7월과 8월에도 그린스마트 스쿨 등 4개 사업이 요구한 지 하루 만에 면제 확정을 받았다.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19 지역고용대응 특별지원 등 15개 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를 요구한 날에 확정까지 받기도 했다.
예산정책처 유민호 예산분석관은 “국가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예비타당성조사가 면제되는 경우, 재정 투자의 우선순위에 있게 되는 점을 고려해 다른 면제 사유에 비해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마련될 필요가 있고 한정된 예산을 배분하는 것이므로 예타 면제가 남발되어서는 안된다”며 “‘지역 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하여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이라는 (면제 사유 제 10호)표현은 매우 추상적이어서 사실상 비수도권에서 추진하는 대규모 SOC 사업은 모두 이에 해당할 여지가 있고, 긴급성의 요건도 불명확하여 대규모 재정사업의 주된 면제 사유로 활용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이어 “그만큼 예타 면제 여부가 행정부의 재량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고, 예타 실시 또는 면제 결정 여부에 다양한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제도의 근본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제10호 면제 사업의 규모가 지나치게 높고 면제 요구시 대부분 선정되는 것으로 나타나 예외적이어야 할 예타 면제가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현행 제10호 면제에 대해 명확하고 투명한 원칙과 기준을 확립하여 예비타당성조사 제도의 신뢰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