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행동

다음 식량위기에 대응할 마지막 기회

2024-09-04 13:00:04 게재

지난 한달간 폭염과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 집 밖을 나서는 게 두려웠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뭐냐고 묻는다면 한치 망설임도 없이 에어컨이라고 응답할 사람이 대한민국 인구수보다는 훨씬 많을 것 같은 여름이었다. 하지만 더위가 꺾이고 가을이 오면 거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에어컨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극심한 무더위를 겪다 보면 농작물 작황도 나쁘리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올해는 지난해에 이어 곡물작황이 나쁘지 않다. 비가 내려야 할 때 내려주어 작물이 잘 자란 덕분이다. 하지만 농부들에게 이런 상황이 마냥 좋을 수는 없다. 자급자족 시대에 풍년은 기뻐할 일이지만 농사가 비즈니스인 시대에 셈법은 복잡하다. 시장 예상보다 더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면 가격은 하락한다. 이걸 ‘풍년의 저주’라고 한다. 미국 농무부는 올해 미국 농가의 순수익은 지난해보다 25%가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지난해 이미 순수익이 16%나 줄어든 이후라 그 충격은 더 크다.

국내에서는 고랭지 채소 수확량이 줄면서 배추값이 오르기는 했지만 농산물가격은 전반적으로 안정세다. 반면 쌀 가격은 작년 연말 대비 10% 가까이 하락해 농민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지난해 재고 부담과 함께 올해 작황이 호조를 보여 벌써부터 시장이 반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에서는 쌀 작황과 재고 분석을 통해서 가격 안정 대책을 재촉하고 있다.

좋아지는 곳도 있다. 축산물 가격 하락과 사료값 부담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축산농가는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길 것이다. 추가적인 사료값 하락 요인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외 식품업계의 대응을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농업을 미래산업으로 지정하고 역량 집중

진짜 주목해야 할 건 따로 있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식량 위기는 곡물 재배면적 증가로 이어졌고, 이어서 농업기후가 좋아지면서 세계 곡물 생산량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 영향으로 농산물가격은 약세로 돌아서고 재배면적은 줄어들 것이다. 만약 이런 추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농업기후가 나빠지면 2022년에 보았던 식량위기 사이클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곡물가격은 다시 급등세로 돌아설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계속 반복되어 온 패턴이었다.

우리는 지난번 식량위기 때보다 더 나은 대응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다. 고려해야 할 게 한가지 더 있다. 지구 평균기온이 상승하면서 기상재해 역시 규모와 강도가 더 커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대응방법을 개선하지 않으면 더 나쁜 결과를 받아 들 수밖에 없다.

대내적으로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하고, 대외적으로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게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런 대책은 모두 투입비용에 비례해 개선되는 게 특징이다. 효과성과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글로벌 농업시장에 과감하게 진입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처음 시작했을 때 중화학공업에 투자했던 것처럼 글로벌 농업을 미래 주력산업으로 지정하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농식품산업 규모를 11조달러로 추정한다. 금융서비스 산업 다음으로 큰 규모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글로벌 농식품기업 윌마와 올람그룹의 매출액은 각각 670억달러, 483억달러에 이른다. 식품기업 하나의 매출액이 우리나라 농업 총생산액보다 더 크다. 싱가포르가 우리보다 식량안보가 더 튼튼한 배경이다.

반면에 2022년 우리나라 농림수산식품 분야의 수입은 555억달러에 이르렀지만 수출은 120억달러에 그쳤다. 농식품산업은 우리나라 무역적자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취약한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농업을 한겨울 거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에어컨처럼 취급해 온 결과다.

R&D 투자 세계 최상위권, 기술경쟁력 있어

우리는 해외 농업개발을 여전히 땅을 확보하고 농사를 짓는 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방법으로 공급망의 다각화라는 식량안보의 목적을 이룰 수는 없다. 세계 농산물시장에서 신흥 강자로 떠오른 농식품기업의 접근 방법론을 참고하면서 과감하게 세계 시장에 진출할 때다. 풍년의 저주가 시장을 짓누를 때가 들어갈 기회다.

다행히도 우리나라 농식품 R&D 투자액은 세계 최상위권으로 기술경쟁력은 충분하다. 마침 한국경제인협회에서는 식량산업을 미래산업으로 제안했다. 이제 정책의지와 비전을 보여줄 때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 소장

농특위 탄소중립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