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행동
전력 중심 에너지전환 정책, 리프레이밍이 필요하다
너무나 더운 추석이었다. 극심한 무더위와 급변하는 날씨가 더 이상 일시적 현상이 아닌 현실로 다가오면서 에너지전환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전세계는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재생에너지 확대에 힘써왔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를 이용한 전기 생산 저장 전송∙분배 등 전력공급에 초점을 둔 단선적인 정책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 구축이라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잉여전력으로 인한 출력제한 문제는 재생에너지 도입에 앞장서던 제주도부터 시작해 호남 등 내륙 지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 설치와 송배전망 확대가 논의되고 있지만 그에 따른 비용은 천문학적 규모일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탄소중립 정책은 주로 전력공급 부문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구체적으로 계획되고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에너지 소비 행태를 살펴보면 최종에너지 소비의 48%는 냉난방 온수 등 열에너지 형태이고, 전기 형태의 소비는 20%에 불과하다. 특히 산업 부문에서는 최종에너지 소비의 60%, 가정·상업·공공 부문에서는 80%가 열의 형태로 에너지를 이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에너지를 포함한 종합적인 에너지전환 정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잉여전력을 열에너지로 활용하는 방법 강구
재생에너지를 전기뿐만 아니라 열로 변환해 다양한 소비 부문에서 활용하고, 부문 간 상호작용을 극대화하면 재생에너지로 발생하는 잉여전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바로 P2H(Power to Heat)이다. P2H의 주요 기술로는 전력을 열에너지로 전환하는 히트펌프 전기보일러, 그리고 열에너지를 저장하는 축열조가 있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재생에너지 잉여전력을 열에너지로 전환하면 기존의 화석연료 기반 열 생산 방식을 대체할 수 있어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다.
특히 P2H의 대표적 기술인 히트펌프는 자연계의 잠열을 활용해 300% 이상의 효율을 낼 수 있어 적은 에너지와 비용으로도 많은 열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030년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 전기의 약 12%가 잉여전력이 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면 제주도 냉난방 수요의 약 17%를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그리고 열에너지는 전기를 저장하는 것보다 비용이 저렴하고 장기 대량저장이 가능해 리튬 배터리 등 전기저장 방식보다 효율적인 에너지 저장 솔루션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역적 특성상 봄과 가을에 전력수요가 낮지만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많기 때문에 향후 전력계통에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지면 대규모 잉여전력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잉여전력을 열에너지로 전환해 저장한 후 냉난방 수요가 많은 여름이나 겨울에 활용하면 재생에너지의 활용도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오픈AI CEO 샘 알트먼이 태양열을 저장했다가 전기로 변환하는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엑소와트에 투자했다. 이는 AI 데이터센터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비한 조치로 열에너지 저장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우리나라는 지역별로 에너지 수요와 재생에너지 공급에 큰 차이가 있다. 현재 호남 지역에서는 태양광과 풍력 발전설비의 지속적인 증가로 잉여전력이 발생하고 있지만 이를 수요가 많은 수도권으로 전달할 송전선로는 충분히 확충되지 않은 상황이다. 각 지역에서 발생하는 재생에너지 잉여전력을 해당 지역의 열 수요에 활용하면 에너지저장장치와 송전선로 설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전력 공급 중심 에너지정책 전환할 때
이와 같은 열에너지의 잠재력에 주목한 독일 덴마크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이미 재생에너지 잉여전력을 활용해 열을 생산, 저장하고 이를 지역난방 시스템을 통해 공급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지역난방 그리드 등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히트펌프 전기보일러 축열조 같은 기술 수준도 높다.
하지만 에너지전환 정책은 여전히 전력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고, 열에너지를 포괄하는 통합적 정책은 부족하다. 열에너지 관련 통계 체계의 부재와 열과 전력 시스템의 별도 운영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에너지 전환은 탄소배출을 줄이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필수적이며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정책은 국가 주도로 이행되는 톱다운 성격이 강하다. 현재의 전력 공급 중심의 에너지전환 전략을 리프레이밍 해야할 때다. 전력공급과 더불어 전력∙열∙수송 등 에너지 소비 측면을 모두 포괄하는 정교한 전략 하에 지원 정책 변화와 기술 혁신이 뒤따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