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지속가능성공시기준 도입 연기의 시사점
많은 기업들이 ‘변화를 주도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스스로를 퍼스트무버(First Mover) 또는 패스트팔로워(Fast Follower)로 기억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는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그간 앞다투어 ESG경영을 표방하던 일부 기업들은 최근 한국지속가능성공시기준(KSSB) 공개초안 관련 의견수렴 절차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도입 연기를 주장한다. 기업의 경쟁력과 신뢰성에 영향을 미치고, 기업과 사회에 이익을 가져다줄 중요한 첫걸음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속가능성 공시 시점을 미루는 문제는 단순한 제도 연기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글로벌 환경 변화와 경제적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는 기업들은 장기적으로 큰 손실을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비용증가에 그치지 않는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만큼 지속가능성 공시를 미루는 것은 국제적으로 뒤처지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EU 등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제도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023년 7월 31일 ESG 정보공개 제도인 기업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의 이행을 위한 위임법안(Delegated Act)을 발표하고, CSRD의 구체화된 정보공개 표준인 유럽 지속가능성 보고 기준(ESRS)을 채택했다. ESRS는 재무적 관점에서의 중대성(financial materiality)과 지속가능성 관점에서의 중대성(impact materiality)을 모두 고려하는 ‘이중 중대성’ 접근방식을 채택했다. 유럽내 기업들은 2024년부터 ESRS에 따라 지속가능성 내용을 의무공시해야 하고 유럽 역외기업에도 순차적으로 적용된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EU가 도입한 제도로 수입 제품에 대해 탄소배출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해 자국의 탄소감축 목표를 지키고, 해외의 탄소배출을 방지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2026년 CBAM이 전면시행된다. 이 시점부터 유럽기업에 수출하는 기업은 제품 탄소배출량을 의무적으로 보고하고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제도가 도입되고 있음에도 아직도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를 지연하고 있는 국내상황은 여러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지금도 심심찮게 언급되고 있는 ‘기후악당’ 이미지가 고착화될 수 있고, 공시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으면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기 어려우며 이는 기업의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KSSB의 도입이 지연되면 기업들은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게 되어 장기적인 기업 가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은 기업의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첫째, 기업의 환경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공시 의무화는 기업들이 자원 사용과 배출량에 대해 투명하게 보고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 공시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명확히 할 수 있으며, 이는 기업의 사회적 신뢰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셋째, 투자자들은 공시를 통해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평가하며, 이는 장기적인 투자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변화 필요성 인지했다면 이젠 변화 주도를
관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당장에는 쉽고 편한 일이지만 이내 뒤처지기 마련이다. 이는 과거의 정책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금융실명제 실시와 전국 광통신망 설치, 그리고 문화 개방을 시도했던 때를 떠올려 보면 이 모든 시도가 그 당시 사회적 저항과 우려로 인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변화를 받아들인 용기 덕택에 현재의 신용 경제로의 도약과 IT 강국으로의 자리매김, 한류라는 이름의 문화 수출국이 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그간 수많은 변화에 잘 적응해 기회로 반전시켜 왔다. 국제사회의 탈탄소 사회를 향한 패러다임 변화에서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이제 그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KSSB초안이 공개되었고 의견수렴 절차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이 시점에 정부와 기업 그리고 투자자들의 집단지성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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