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전쟁과 전략이 빚어낸 베트남 민족

2024-10-10 13:00:04 게재

몽골의 침략을 두차례나 막아낸 베트남 최고의 전쟁 영웅 쩐 꿕 뚜언(쩐 흥 다오)은 1300년 여름 자택 병상에서 황제 아인똥(영종)을 맞았다. 황제는 장군의 건강보다 그의 죽음 뒤에 감당해야 할 나라의 미래가 더 걱정이 되어 친히 문병을 갔던 것이다.

“만약 북쪽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온다면 어떤 방책이 있겠소?” 장군은 24세의 젊은 황제에게 가르치듯 답했다. “만약 적군이 장사진을 치고 큰 불이나 바람처럼 무턱대고 공격해 온다면 이기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빠른 승리를 연연하지 않고 흡사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야금야금 쳐들어오면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장군을 원수로 임명해 바둑을 두듯 유연하게 움직이고, 장수들은 군졸들을 자식처럼 다루며 백성들의 마음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평소 흥 다오 브엉(흥도왕)이라 불리던 쩐 꿕 뚜언은 두달 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베트남의 역사와 베트남인들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세차례나 침공한 몽골에 당당히 무력으로 맞서 패배를 안겨준 것은 베트남이 유일하다. 마지막 두번의 승리로 몽골을 베트남에서 완전히 몰아낸 주역 흥도왕은 알렉산드로스 징기스칸 한니발 나폴레옹 카이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군사지도자로 평가받을 정도다(the-toptens.com). 그를 도교적 신으로 추앙하는 덕성진신앙(띤 으엉 득 타인 쩐)이 베트남 3대 민간신앙 중 하나로 등극했으니, 쩐 꿕 뚜언은 우리 이순신 장군과 최 영 장군의 명성과 유산을 겸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함축된 베트남의 전략

쩐 꿕 뚜언의 유언은 리더십과 전략, 게릴라전, 장기전, 국민 단합과 지지의 중요성을 담고 있다. 뚜언뿐만 아니라 강대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른 군사지도자들이 남긴 언행이나 격문들은 한결같이 중국과의 항쟁을 승리로 이끈 장수들을 일일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베트남의 고유한 군사전략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왔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모든 군사적 지식 전략 전술을 미국과 벌인 베트남전쟁에 모두 쏟아부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항상 장기전을 각오하는 것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물론이고 근현대에 프랑스와 미국 같은 서방국가는 모두 강대국이자 군사강국이었는데 이들과의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낸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그것보다도 전쟁을 장기로 이끄는 전략은 지리 환경 기후 보급 등 여러 측면에서 침략자들에게 불리한 점을 극대화해 주는 장점이 있다.

베트남을 침공했던 외국 군대는 열대의 무더위 습기 풍토병 전염병에 취약했고, 산맥과 바다에 가로막히고 길게 뻗은 베트남 전장에 식량을 보급하는 일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적 요인을 베트남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잘 활용했다. 후 레왕조를 창건한 레 러이는 명과의 독립전쟁을 10년간(1418~1428) 끌면서 항복 휴전 강화를 반복한 끝에 결국 승리와 독립을 쟁취했다. 몽골과 쩐왕조 간의 전쟁은 무려 30년을 끌었다.

둘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게릴라전술이다. 게릴라전술은 541년 중국(당시 양나라) 쟈오쩌우(지금 하노이부근의 중국지배 영토) 자사의 학정에 항거해 일어난 리본의 반란 기록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는데, 강력한 외국 내지 자국 군대에 맞서는 베트남인들의 단골 전술이 되었다.

레 러이는 게릴라전의 명수였다. 저지대나 도시에 주둔하거나 대로를 행진하는 군대를 ‘치고’ 정글 속으로 ‘빠지는’ 전술은 외침보다 훨씬 빈번했던 내부 반란세력들이 즐겨 사용했다. 고지대나 정글이 산재한 베트남 지형상 매우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베트남전쟁(1964~1975) 중에는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전술에 절망한 미군들이 농촌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고 고엽제를 살포해 정글들을 없애버리려고 했다.

임기응변에 능한 외교 전략과 전술

셋째는 베트남의 임기응변식의 능수능란한 외교 전략 전술을 들 수 있다. 쩐 꿕 뚜언의 유언을 많은 사람들이 “유연하다”고 번역하지만, 한문으로 된 원문은 “바둑을 둘 때 그러하듯이 수시로 제어한다(如圍棋然,隨時制之)”고 되어 있어 ‘임기응변에 능하게’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가까울 것이다.

외국과의 전쟁 중 베트남이 동원한 외교적 군사적 책략들은 그 범위와 방식이 현란할 정도로 넓고도 다양했다. 베트남 초기국가인 남비엣의 황제 찌에우 다(자오투오)가 한의 사신 루쟈(陸賈)를 속이고 중국을 향해서는 신하이자 왕으로 몸을 낮췄지만 내부나 주변 약소국을 향해서는 황제를 자처한 것이 베트남 외교의 향후 2000년 프로토콜이 되었다. 1790년 떠이 선 왕조의 꽝 중 데(응우옌 반 후에)는 청조 건륭제 만수축전에 자신과 외모가 비슷한 생질을 자신이라고 속여 보내는 농락도 서슴지 않았다.

베트남 역대 왕조들이 택한 외교적 군사적 전략은 규범 관행 조약에 구애받지 않았다. 거짓항복을 밥 먹듯이 하고 전쟁에 이긴 후에는 예외없이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했다. 먼저 조공을 약속하고 심지어 전쟁에 승리하고도 항복한 경우도 있었다. 종전 후에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쪽은 항상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전쟁 후에도 베트남은 미국에 오랫동안 외교정상화를 구애했다.

이러한 베트남의 전략전술은 상대방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몽골은 세번 다이비엣을 침공해 세번 수도 탕롱(현재의 하노이)을 점령했지만 탕롱은 점령군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도시가 되어 있었다. 쫓아오면 도망가고 물러서면 배후를 쳤다. 군대의 규모도 ‘수시로’ 확대 축소했으며, 정규군 비정규군 구분도 모호해 농민은 군인으로, 군인은 농민으로 ‘수시로’ 변모했다.

국민 단합이 승리의 가장 중요한 원인

마지막으로, 국민의 단합과 지지를 확보하는 길이다. 사실 일반 국민들의 지지와 지원은 베트남의 과거 현재 국가들이 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베트남 역사서들이 농민 백성 인민 민중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해 혼란을 불러일으키지만 왕조 또는 정권에 대한 일반인들의 지지가 대외전쟁에서의 승패를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은 심지어 한나라에서 송나라에 이르는 역대 중국왕조들이 베트남 점령지역에서 행한 통치에서도 관철되었다. 선정을 베풀었던 중국인 관리들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안정을 누릴 수 있었고, 학정을 했던 이들은 토착인들의 반란이나 중국 조정에 의해 쫓겨났다. 응오꾸엔 이후 독립 왕조들과 이에 반기를 든 세력들도 일반인들의 지지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외국과의 전쟁이나 토착정부에 대한 반란의 승패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1400년과 1527년 호 꾸이 리와 막 당 중이 각각 정권 찬탈에 성공했으나 독립된 왕조 건설에는 실패한 이유가 선정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1771년 떠이 선 반란을 일으킨 3형제 중 한사람인 응우엔 반 후에는 그 반대의 이유로 왕조도 창건하고 청나라의 침략도 물리쳐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국민의 단합과 지지라는 이 마지막 조건이 베트남민족의 형성을 예외적인 사례로 보는 근거가 된다. 베트남 국가에 지지를 보냈다고 하는 국민 일반인 백성 인민 민중 등등을 개념적으로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는 이론적 과제로 남지만 역대 베트남 왕조들과 국가들이 중국이나 강대국과의 수많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비결을 오로지 ‘국가’만의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국가와의 일체감, 다른 사람들과 동류의식 없이 단결하고 국가에 지지를 보냈을 리 만무하다. 근대에 들어 신세계에서 차별받고 착취받던 자들 사이에서 민족주의가 출현했듯이 베트남은 유난히 긴 외국지배와 잦은 전쟁의 경험으로부터 민족적 정서가 좀 더 일찍 싹트지 않았을까?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