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아시아 인터넷 시장 놓고 각축전
이코노미스트 “중국, 12개 국가 중 7개국 인프라 장악 … 뒤처지는 미국, 보안우려 부각”
말레이시아 남부 조호르주의 신도시 누사자야에 테크파크가 들어서고 있다. 싱가포르 국경에서 불과 15㎞ 떨어진 이 산업현장에는 크레인과 건축자재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 외관상 일반적인 건설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하지만 겉모습과는 다르다. 이곳엔 미중 주요 디지털기업이 이용할 거대한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는 중이다.
누사자야는 세계 경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 간 디지털 인프라 경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한눈에 보여준다. 누사자야를 포함하는 조호르주에는 미중 두 강대국의 인프라가 공개경쟁을 벌이며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전세계 250개 이상의 데이터센터를 보유한 미국 디지털 인프라 기업 ‘에퀴닉스’의 데이터센터 바로 아래엔 중국 기업 ‘GDS홀딩스’의 데이터센터가 있다. GDS는 중국 거대 기술기업 알리바바와 텐센트 등을 고객사로 둔 기업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긴박한 상황이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지만 디지털경쟁에서 중국에 뒤처질 위기에 처했다. 양국은 인터넷의 물리적 토대가 되는 데이터센터와 해저케이블에 대한 통제권과 소유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통신인프라를 지배해 왔다. 하지만 이제 그 지배력은 약해졌다. 디지털 인프라 애널리스트인 막시밀리언 메이어와 옌치 루 2명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지적재산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디지털 의존도’ 지수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 10년 동안 디지털 인프라와 관련한 기술독립을 이룬 국가로 발전했다.
아시아 전역의 인터넷 인프라를 보면 미국과 중국의 지배력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중국은 태국과 필리핀의 모든 클라우드 컴퓨팅 클러스터를 장악하고 있다. 이 두 나라는 미국이 ‘비(非)NATO 주요 동맹국’으로 간주하는 국가들이다.
영국 옥스퍼드 인터넷 연구소의 2023년 12월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아 12개국 중 7개국은 중국이 운영하는 클라우드 클러스터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반면 호주와 인도 한국은 대부분 미국이 운영하는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기업들은 이미 큰 발자취를 남겼다. 알리바바는 아시아 8개국에 데이터센터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2021년 이후 현재까지 아시아에 500개 이상의 중대형 데이터센터가 설립됐다. 내년에는 270개 이상의 데이터 센터가 추가로 설립될 예정이다.
컨설팅업체 가트너는 올해 인터넷 서버에 대한 지출이 39%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이동통신사업자협회(GSMA)’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의 모바일데이터 트래픽은 2030년 현재보다 4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AI) 애플리케이션과 관련된 새로운 컴퓨팅 수요가 데이터센터 수요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태국 필리핀 등서 중국 영향력 100%
상업적 필요성은 보안과 쉽게 분리될 수 없다. 중국은 데이터를 토지 노동 자본과 같은 ‘생산요소’로 보고 있다. 초기 인터넷 선구자들은 데이터가 탈중앙화 네트워크를 통해 자유롭게 흐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4가지 관문(choke points)이 존재한다. 인터넷 기업들이 트래픽을 라우팅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해주는 ‘인터넷 익스체인지 포인트(IXPs)’와 데이터센터, 해저 광섬유케이블, 통신회사 등이 그것이다. 4가지 관문 모두 스파이 활동에 취약하다. 해저케이블 도청은 냉전시대부터 스파이들이 즐겨쓰던 수법 중 하나였다. 해저케이블이 육지로 올라오는 랜딩스테이션은 데이터감청의 허브다. 이런 인프라에 백도어를 설치할 수 있다.
미국정부는 “중국이 IXP에서 트래픽을 원하는 다른 경로로 우회시키거나 트래픽에 접근해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IXP를 통해 흐르는 데이터가 암호화됐다고 해도 메타데이터(데이터를 설명해주는 속성정보)가 노출될 수 있다고 본다.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아시아의 데이터센터에 의구심이 커진 계기가 있었다. 파푸아뉴기니정부는 2019년 수도 포트모르즈비에 소재한 중국 관련 데이터센터가 암호화 방법을 사용해 정부 데이터를 도청에 노출시킨 사실을 발견했다.
중국의 경우 기술기업과 정부, 공산당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된다. 중국 법률은 국가가 기업에 데이터를 넘기도록 강제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이 권한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알리바바와 텐센트는 과거 고객데이터에 대한 정부의 이전 요청을 거부한 바 있다. 하지만 관심 있는 데이터가 있을 경우 중국정부는 이를 알고자 애쓸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일부 국가들은 위기상황에서 중국이 데이터센터나 통신서비스를 차단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나아가 중국이 사이버 스파이 활동과 국가와 연계된 해커군단을 결합해 특정국가를 괴롭힐 수 있다고 의심한다.
물론 중국뿐 아니다. 미국 등 각국 정부는 기술기업에 데이터를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 있다.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에이브러햄 뉴먼과 존스홉킨스대 교수 헨리 패럴은 ‘지하제국 : 미국은 어떻게 세계경제를 무기화했나’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미국 정보기관은 클라우드기업과 AT&T 같은 기업들에 아군과 적군을 감시하도록 강요해 왔다”고 폭로했다.
“중국 위험하면 미국도 위험한 나라”
중국기업들의 높은 시장점유율은 중국정부의 야심찬 계획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진핑 주석이 주창한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에서 파생된 디지털 실크로드 전략은 인프라 구축과 데이터 거버넌스를 결합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중국기업들은 기술 선두에서 경쟁하며 저렴한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치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알리바바 클라우드는 2023년부터 가격을 3차례 인하했다. 통신장비 회사인 화웨이는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공격적인 전략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국내외에서 ‘데이터주권’을 내세우며 글로벌 기술표준제정 기구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베트남 등은 중국의 엄격한 데이터현지화법을 차용하고 있다. 중국에서 생성된 데이터를 물리적으로 중국 내 시설에 저장토록 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역외 이전을 제한하는 법이다. 이러한 법으로 애플이나 테슬라 같은 미국기업들은 중국에서 생산된 데이터를 손에 넣을 수 없게 됐다.
미국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 ‘민주주의수호재단(FDD)’은 “중국의 전략은 자국 데이터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면서 다른 나라들에는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해주는 ‘비대칭적 지배’를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디지털 영향력을 억제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일부분 성공을 거뒀다. 첨단 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규제는 중국의 AI 데이터센터 야심에 제동을 걸고 있다. 미국정부는 환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여러 해저케이블 부설 프로젝트에서 당초의 목적지인 홍콩 대신 필리핀 등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통해 우회하도록 했다.
미국은 2022년 보조금과 제재 위협을 내세워 화웨이에서 분사한 해저케이블 기업 HMN테크놀로지를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대규모 케이블 네트워크 운영진에서 축출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케이블 건설업체 OMS그룹은 “미국과 중국을 직접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은 사라졌다. 지난 15년 동안 단 1곳만 구축됐다”고 지적했다.
일부 미국 동맹국들은 중국의 디지털 인프라 구축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일본과 호주는 자국의 데이터 주권에 대한 위험을 이유로 중국기업들을 규제하고 있다. 이들은 화웨이와 중흥통신(ZTE)의 5G인프라를 금지했다. 일본과 호주는 지난달 태평양 섬나라들에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는 공동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인도는 한발 더 나아가 수백개의 중국 앱을 금지하고 알리바바, 휴대폰 제조업체 샤오미를 포함한 여러 중국기업들을 조사하고 있다. 알리바바 클라우드는 올해 인도와 호주에 있는 데이터센터를 폐쇄했다.
미국정부 일각에선 중국 기술을 배제하는 아시아 국가들에게 그 대가로 미국이 AI와 사이버 보안기술, 표준 등에 대한 접근권을 제공하는 내용의 디지털 무역협정을 체결하자는 방안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여전히 중국 디지털 인프라의 위험성에 대한 미국의 호소에 귀를 닫고 있다. 중국이 스파이 행위를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 무엇보다 미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 관계자는 화웨이 장비의 위험성을 묻는 질문에 “그렇다면 모든 것들이 위험하다”고 답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