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감선(減膳)’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서울 자치구들이 턱없이 깎인 내년 예산 때문에 멘붕에 빠졌다. 정부 세수감소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라지만 평년 예산의 40% 가까운 허리띠 졸라매기가 현실로 다가오면서다.
정확한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자치구들 사이에선 내년 서울시로부터 받을 교부금 삭감액이 5000억원, 많게는 그 이상도 될 수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재정자립도가 높아 교부금을 수령하지 않는 강남구를 제외하면 24개구가 삭감분을 분담한다. 만일 깎이는 돈의 총액이 6000억원이라면 한개 자치구당 줄어드는 예산은 어림잡아 250억원에 육박한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자치구들은 마른 수건을 쥐어짜고 있다. 구정을 뒷받침하는 주민단체들 교육 예산은 전액 삭감됐고 일반사업 예산도 30% 이상 잘라냈다. 도로유지예산은 물론이고 주민 대상 교육 프로그램도 대폭 축소 중이다. 구청장 공약 사업은 말할 것도 없다.
편차가 있지만 자치구 예산 중 사회복지비 기준의 약 75%는 매칭사업비로 쓰인다. 노인기초연금 등 국비가 내려오면 해당 비율만큼을 의무적으로 구 재정으로 충당해야 하는 사업들이다.
민생 최전선을 지키는 자치구 사정이 이런데 국책 금융기관들은 돈잔치를 하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정일영 의원에 따르면 한국수출입은행과 한국투자공사는 파견 직원을 위한 해외 주택 임차료로 연간 약 48억원을 지출하고 있다. 수출입은행의 베트남 사택 가운데 한곳은 수영장이 구비된 국내 5성급 호텔기업의 레지던스로 확인됐다. 스리랑카 콜롬보의 사택도 64평에 5성급 호텔 수준이었다. 이들에겐 사택 임차료 외에 국외 근무수당, 연 1200만원 상당의 자녀 학자금도 지원된다.
이 소식을 들은 자치구 관계자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않는다. 기초 지자체들은 돈 1억원이 없어 필수사업을 접는 판에 정작 중앙정부에선 혈세가 줄줄이 새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왕들은 가뭄으로 기근이 들면 백성들과 고통을 나누기 위해 ‘감선(減膳)’을 실시했다. 왕 자신의 식사를 줄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감선을 할 땐 고기나 기름진 음식을 줄이고 채소 중심 식단을 편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1년 이상 지속된 가뭄으로 인해 스스로 술을 끊고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감선까진 기대도 않는다. 하지만 국민 일상을 책임지는 기초지자체들에겐 혹독한 예산삭감을 요구하면서 정부 기관들은 흥청망청한다면 주민들에게 줄 돈을 주지 못한 지자체 공무원들은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감세정책으로 나라 곳간을 비운 정부다. 정부는 지자체를 옥죄기 전에 집안부터 단속해야 한다.
이제형 자치행정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