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바이든 대통령은 왜 ‘인디언 기숙학교 정책’에 사과했나

2024-10-29 13:00:01 게재

남수경 뉴욕주 변호사

지난 25일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애리조나주 힐라 강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했다. 재임 중 처음으로 원주민 보호구역을 찾은 그는 원주민들 앞에 고개 숙여 미국 정부의 ‘인디언 기숙학교’ 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인디언 기숙학교 정책은 1800년 대 초부터 약 150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 아이들을 기숙학교에 수용해 원주민 언어와 전통 문화 등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말살해 백인 문화에 동화하게 만들려는 시도였다. 부모와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기숙학교에 보내진 원주민 어린이들은 신체적, 정서적, 심지어 성적인 학대에 빈번하게 노출되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방정부의 인디언 기숙학교 정책과 그것이 초래한 고통은 언제나 미국 역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면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모르는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챕터 중 하나”이자 “영혼에 대한 죄”라는 표현을 쓰면서 원주민에 대한 미국정부의 인권탄압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미국정부가 인디언 기숙학교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주민 출신 내무장관이 이끈 진상조사

미연방 내무부는 지난 7월 아메리카 인디언 기숙학교 정책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 역사상 첫 원주민 출신 각료인 내무장관 뎁 할랜드의 지휘 아래 지난 2021년 정부가 원주민 기숙학교에 대한 첫 진상규명에 착수한 결과물이다. 라구나 푸에블로족 출신인 할랜드 장관의 집안도 3대에 걸쳐 강제로 기숙학교에 수용된 경험이 있다고 알려진다.

미국은 1819년 시행된 원주민 관련 법을 계기로 인디언 동화정책 일환으로 기숙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819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 전역 37개 주에 417개의 원주민 기숙학교가 있었다. 정부가 직접 운영하거나 교회 등 종교기관에 위탁 운영된 기숙학교에 수용된 아메리카, 알래스카, 하와이 원주민 아동의 수는 적어도 1만9000명에 달했다. 불과 네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도 부모에게 분리되어 강제로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에 외부인 차량이 나타나면 아이들이 ‘납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 속으로 피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원주민 아이들이 기숙학교에 보내지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수백명의 생존자들이 인터뷰에 응했는데,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기숙학교 내에서 정서적, 신체적 학대는 물론 일부 학교에서는 성적학대도 만연했다고 증언했다. 원주민의 정체성을 박탈하기 위해 각종 억압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아이들은 원주민 이름 대신 미국식 이름이나 번호로 불렸고, 원주민 언어를 쓰면 체벌이 가해졌다. 전통의상 대신 교복을 입어야 했고, 길게 땋은 머리는 짧게 잘렸다. 기독교 개종을 강요한 것은 물론이다. 한 생존자는 분유나 고기 통조림 등 가공식품을 먹은 아이들이 심각하게 아팠는데, 제대로 된 치료는커녕 침구나 옷을 더렵혔다고 구타를 당했다고 회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원주민 아이들 중 최소 973명이 영양실조와 질병, 학대 등으로 끝내 부모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했음이 밝혀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사과 연설 중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65개의 기숙학교 부지에서 최소 74개의 집단 매장지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21개는 아무런 표식조차 없었다.

지난 5월 워싱턴포스트는 1950~60년대 가톨릭교회가 운영한 인디언 기숙학교에서 벌어진 아동 성학대를 심층취재해 보도했다. 이 기사는 약 22개의 인디언 기숙학교에서 10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신부와 수녀 등 사제들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한 사실을 생존자들의 입을 빌려 폭로했다.

이렇듯 동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아메리카 원주민 아이들에게 가해진 인권탄압은 미국뿐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벌어졌다. 수년 전 캐나다정부와 가톨릭교구가 운영한 기숙학교에 15만명이 넘는 원주민 어린이들이 강제 수용되어 학대당했다는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온 후 캐나다 총리와 프란시스 교황이 공식 사과를 한 바 있다.

1960년 말 이후 미국에서 원주민에 대한 강제 동화정책이 점차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150년 이상 진행된 인권탄압과 학대의 결과는 지금까지 원주민 공동체에 짙은 그림자로 남아있다. 어린 나이에 가족으로부터 강제 분리되어 학대를 당한 원주민 아이들은 이후 평생 계속되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미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이 지원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메리카 원주민 성인이 평균적인 미국인보다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기대수명도 훨씬 낮은 이유는 성장기 때 기숙학교에 다녔던 것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수세대에 걸쳐 제대로 교육 받을 기회를 빼앗긴 원주민들은 또한 높은 빈곤율에 시달리고 있다.

2015년에 나온 정부 데이터에 따르면 백인 가구 소득을 1달러로 볼때, 원주민 가구 소득은 60센트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숙학교 진상보고서는 정부의 공식 사과뿐 아니라, △원주민 어린이들의 죽음을 기리고 일반 대중을 교육하기 위한 국가 기념관 건립 △원주민 공동체의 세대 간 트라우마 치유에 대한 지원과 연구 투자 △원주민 언어 되살리기 프로그램 지원 등을 정부에 요청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역사적인 사과에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뒤늦게라도 정부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공식 인정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면서도, 구체적인 후속조치 없이 립서비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견이다.

사과뿐 아니라 실질적 후속조치 나와야

여러 세대에 걸쳐 원주민에게 가해진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사에 대한 재조명뿐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과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메리칸원주민 권리펀드(NARF)’의 베스 롸이트 변호사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번 사과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조치이기는 하지만, 이번 사과가 효과를 발휘할 만한 실질적인 조치가 반드시 취해져야 한다”고 밝혔다.

희생자들의 유해 반환 등 상처 치유를 위한 조치가 뒤따를지 여부가 아직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 원주민 인권단체는 40년 가까이 수감 중인 인디언 저항운동의 상징 레너드 펠티에 또한 기숙학교 정책의 희생자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번 사과의 후속조치에 원주민 인권운동가 레너트 펠티에 사면이 꼭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바이든이 연설을 하던 도중 청중 속에서 “팔레스타인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있으면서 어떻게 학살에 대해 사과할 수 있는가” 라는 외침이 나오기도 했고, “아직 무덤에 아기들이 묻혀 있는 한 당신의 사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항의를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또한 바이든의 이번 공식사과가 코앞으로 다가온 선거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원주민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행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합주 중 하나인 애리조나주의 원주민 수는 전체 주민의 6%밖에 안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전체 대의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하지만 애리조나 같은 초박빙 경합주 승부에 따라 선거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원주민들의 표를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일반적으로 원주민들 사이에서 공화당보다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더 강한 경향이 있기에 이들이 실제 투표장에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사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공식사과가 처음 투표에 참여하는 젊은 원주민 유권자들이나 관망하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투표에 참여할 동기를 부여할 뿐 아니라 노스캐롤라이나, 네바다, 미시간 등 다른 경합주 원주민들의 표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