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100조달러 공공부채 해법 제시

2024-10-30 13:00:01 게재

블룸버그통신 “발생주의 회계 기반 통합 대차대조표로 각국 정부 현명한 장기 투자 가능”

1980년대 초 뉴질랜드는 경제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70년대 2차례 오일쇼크로 지속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그 10년 전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주요 수출시장에 대한 접근성도 차단됐다.

뉴질랜드 역대 정부는 수많은 정책 오류로 국민 고통을 가중시켰다. 보조금을 퍼주고 인플레이션 보상금을 지급했고 물가통제를 시도했다. 또 금리는 너무 낮게, 세금은 너무 높게 유지했다. 그 결과 실업률이 치솟고 부채가 늘어났다. 당시 뉴질랜드는 가난하면서도 많은 규제를 시행한 공산국가 알바니아에 빗대 ‘남태평양의 알바니아’로 불렸다.

뉴질랜드 로저 더글러스 전 재무장관. 1985년도 사진. 출처 뉴질랜드국립도서관 홈페이지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26일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국가 중 하나로 탈바꿈했다”고 전했다. 1984년 새로운 노동당정부가 들어서면서 ‘로저노믹스(Rogernomics)’라는 일종의 충격요법에 착수했다. 당시 재무장관 로저 더글러스(사진)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뉴질랜드정부는 환율통제 조치를 폐지하고 보조금을 삭감했다. 서비스를 민영화하고 금리책정 책임을 새로 독립한 중앙은행에 넘겼다. 뉴질랜드는 또 공공행정 전반에 이전과는 다른 회계방식을 도입했다.

각 정책의 정확한 파급력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발생주의 회계로의 전환이 핵심 요인이었다는 분석이다. 전 뉴질랜드 재무부 고위관리로 현재 웰링턴빅토리아대 공공재정관리학과 교수인 이안 볼은 올해 2월 공동저술한 ‘공공 순자산(Public Net Worth)’에서 “뉴질랜드 공공 회계개혁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회계는 무미건조한 분야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현금주의 회계방식에서 벗어나 민간기업들이 사용하는 발생주의 방식으로 전환하자 뉴질랜드정부 각 부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산의 효율적 사용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됐다.

발생주의는 현금주의와 다른 개념으로, 거래나 사건, 그리고 환경이 기업에 미치는 재무적 효과를 현금이 수취되거나 지급되는 기간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거래가 발생한 기간에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비용과 수익, 부채 규모 등 경영성과 파악이 용이하다.

예를 들어 현금주의 회계에서는 연금을 지급할 때 부채로 계상하는데 이는 수년 뒤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이에 대한 충당금을 적립할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 하지만 발생주의 회계에서는 연금 약정에 대한 비용을 보험료를 받는 시점에 부채로 기록해야 한다. 이에 따라 뉴질랜드정부는 2001년 미래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연금기금을 설립했다. 오늘날 이 준(準) 국부기금은 여러 국가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다.

발생주의 회계에서는 건물이나 인프라 같은 자산이 노후화돼 결국 쓸모없게 되는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 매년 예산에 관련 비용을 포함한다. 회계용어로 이를 감가상각이라고 부른다. 이 비용이 매년 예산에 반영되기 때문에 정부는 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해 자산의 가치를 높이려는 강력한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 현금주의 회계에서는 이러한 인센티브가 없다. 때문에 장기투자가 지연돼 결국 건물이 낡고 인프라가 무너지면 미래세대가 그 비용을 떠안게 된다.

회계개혁으로 순자산 증가 추세

이안 볼 교수는 “뉴질랜드 회계개혁의 성공은 재정 성과에 반영돼 있다”고 말했다. 볼 교수에 따르면 뉴질랜드정부는 회계개혁 이전 20년간 적자를 기록했지만, 개혁이 시작된 지 10년 만인 1994년부터 대차대조표가 강화되고 순자산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대차대조표가 강화되면서 부채가 줄어드는 효과도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4년, 그리고 2011년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1%에 해당하는 피해를 제외하고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매년 순자산이 증가했다.

볼 교수는 역사학자, 은행가, 영국 전 재무부 관리, 씨티그룹 전 글로벌 수석이코노미스트 등과 함께 쓴 ‘공공 순자산’을 통해 뉴질랜드의 경험을 수출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의 정부들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과도한 공공부채다. 특히 인구고령화, 지정학적 긴장, 지역경제적 분열, 기후변화 대응 비용이 재정압박을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회계개혁 접근법이 어떻게 해답이 될 수 있는지를 책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미국 공공부채는 GDP 100%에 육박한 상황이다. 2034년에는 GDP의 122%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유로존의 많은 국가들은 단일통화 규칙을 준수하기 위해 부채와 재정적자를 통제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학자들은 “전세계 공공부채가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많으며 향후 더 악화될 수 있다”며 “각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훨씬 더 큰 재정조정을 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IMF의 최근 추산에 따르면 올해 말 전세계 공공부채는 100조달러를 넘는다. 이는 전세계 GDP의 약 93%에 해당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교수를 비롯한 ‘공공 순자산’ 저자들은 발생주의 회계가 공공부문의 생산성을 개선해 현금이 부족한 정부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공공재산을 더 잘 관리함으로써 보다 쉽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금주의 회계는 현재 시장가치나 감가상각비를 고려치 않고 자산가치를 평가할 가능성이 높다.

자산에 대한 최신 평가가 없으면 건물을 개조하거나 매각해야 할 시점, 주정부가 서비스 비용을 얼마로 책정해야 할지 등과 관련한 정부의 의사결정이 불투명하게 이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로망은 소중한 공공자산이다. 하지만 현금주의 회계에서는 통행료나 도로 가격책정 또는 기타 메커니즘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인센티브가 없다.

볼 교수는 “뉴질랜드에서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자본차입비용을 적절히 산정하는 게 초기과제 중 하나였다”며 “이 정보를 바탕으로 정부는 국가와 민간 부문 중 누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적합한지 결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는 옛 속담이 정확히 들어맞는 대목이다.

뉴질랜드 모델 완전히 따른 나라 없어

1980년대 뉴질랜드의 회계개혁은 당시의 광범위한 지적 흐름을 따랐다. 20세기 중반 현대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활동이 복잡해지면서 보다 전문적인 관리가 필요해졌다. 학계와 싱크탱크, 특히 영미권 국가에서 등장한 신공공관리학파는 민간 부문에서 사용되는 것과 유사한 ‘고객중심 상업적 접근방식’을 공공서비스 기관에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발생주의 회계가 그 핵심으로 여겨졌다.

30년 전만 해도 영국이 뉴질랜드의 뒤를 따를 것 같았다. 1994년 당시 영국 재무부 장관이었던 켄 클라크는 의회에서 “공공지출에 대한 우리의 정부회계는 구식이 됐다”며 발생주의 회계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영국은 2011년에야 비로소 발생주의 회계를 도입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상적인 정부재정 관리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영국 정치권은 신임총리 레이첼 리브스가 자산과 부채를 고려하는 재정체계 개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에 떠들썩했다. 30일(현지시각) 발표될 영국정부의 예산안에서 이러한 개혁이 관철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볼 교수는 “발생주의 회계체계를 준비하는 것은 단계 중 하나에 불과하다”며 “발생주의 회계가 정부의 의사결정 근거로 사용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아직 뉴질랜드 모델을 완전히 채택한 국가가 없는 이유일 수 있다. 투명한 회계는 장기적인 부채의 압박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정치인들에게 더 큰 책임감을 지운다. 공무원들에게도 회계시스템 변화는 격변을 의미한다. 블룸버그는 “발생주의 회계 기반 국가예산은 정직하고 투명한 정부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용감한 정치인이 이를 실현하고 싶을지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공공 순재산’ 공동저자 중 한명인 서던캘리포니아대 철학·역사·회계학 교수 제이컵 솔은 올해 3월 한국을 찾은 바 있다.

그는 한국조세재정연구원 한국회계기준원 한국회계학회가 개최한 ‘회계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는가’ 공동세미나에서 “한국정부도 발생주의 회계를 활용하는 것으로 아나 아직은 부족하며 의회 혹은 고위급 공무원의 정책적인 선택에 따라 대차대조표에선 무엇이 바뀌는지 보여주는 문서는 없다”며 “발생주의 회계를 전문성 있게 사용했다면 국민에게 현 상황이 어떠하고 정책적 선택에 따른 효과가 무엇인지 숫자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회계를 잘하고 있으나 아직 완벽하지 않고, 많은 도전과제를 갖고 있다. 정부 각 부처가 잘 관리하고 있지만 하나의 통합적인 대차대조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며 “뉴질랜드가 시행한 ‘발생주의 회계 기반 통합된 정부 대차대조표를 한국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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