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에도…다국적 제약사들, 중국 바이오에 대거 투자
올해 중국개발 신약에 31억5000만달러 투자
트럼프, 서구-중국 바이오 협력 막을지 관심
미중 지정학적 갈등으로 반도체와 전기차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탈동조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신약개발 부문에서는 서구와 중국의 협력이 가속화되고 있다. 내년 1월 출범할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제약 협력까지 막아설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3일 바이오업계 정보 플랫폼 기업인 ‘딜포마’를 인용해 “올해 들어 현재까지 7개 주요 글로벌 제약사들이 중국에서 개발된 신약을 라이선싱하거나 판매권을 인수했다”며 “현금과 주식 등 선불금으로 건넨 자금만 최소 31억5000만달러다. 다른 제약사들은 흙속의 진주를 찾기 위해 중국 현지에 속속 진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금융사 ‘스티펄 파이낸셜’의 10월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제약사 연구개발(R&D) 책임자들은 예외 없이 지난해 최소 1번 이상 중국을 찾았다. 미국 제약사 ‘애브비’와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큅’은 중국 제약사들을 만나기 위해 상하이에서 파트너십 행사를 열었다. 로슈와 바이엘, 일라이릴리는 제약 스타트업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중국에 창업보육센터를 설치했거나 설치할 예정이다. 화이자는 최근 무역엑스포에서 “향후 5년 동안 중국에 10억달러를 투자해 현지 제약사들과 협업할 것”이라고 밝혔다.
블룸버그는 “그간 미국과 유럽 제약사들은 중국 현지 R&D센터를 폐쇄하거나 생산시설을 다른 나라로 옮겼지만, 신약 라이선싱과 인수에서만큼은 중국과 굳건히 손잡고 있다.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시장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로슈의 아시아·신흥국 파트너링 대표를 지낸 대런 지는 “이처럼 많은 다국적 제약사들이 중국에서 유망 바이오기업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걸 본 적이 없다”며 “내가 설립한 상하이 바이오기업 ‘엘피사이언스 바이오팜’은 여러 제약사들과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그동안 외국계 제약사들의 아웃소싱 중심지로, 복제약을 주로 생산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글로벌 제약사들의 신약 사냥터로 변모했다. 중국정부가 제약 등 최첨단 산업에 아낌없이 지원하는 덕분이다. 맥킨지에 따르면 지난 6년 동안 중국의 신약 라이선싱 비중은 3배 늘었다. 2023~2024년 글로벌 비중은 12%에 달했다.
중국이 최상급 약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면서, 글로벌 제약업계 지도가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20년 동안 신약 후보를 찾아 중국을 드나들었던 아스트라제네카 종양연구 대표인 수전 갤브레이스는 “중국에서 진정한 혁신을 목격하고 있다”며 “학습과 적응의 속도가 전세계 그 어느 곳보다 빠르다”고 말했다.
소규모 바이오기업의 유망한 약물을 찾아다니는 건 거대 제약사들의 일상이다. 이들은 자체적인 신약개발을 꾀하기도 하지만, 안정적 매출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이들이 발견한 유망한 신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표한다. 라이선싱은 기본이고 아예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기도 한다. 로슈와 머크, 존슨앤존슨이 가장 열정적인 곳들이다.
최근 거대제약사들은 특히 다급해졌다. 암과 염증, 기타 질병에 대한 약물 특허만기가 2030년 종료되기 때문이다. ‘특허절벽(patent cliff)’으로 불리는 이같은 상황으로 연간 1800억~3600억달러에 이르는 매출이 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여러 제약사 CEO들은 블록버스터 신약(최소 연매출 10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유망 약물)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까지 중국 제약사들의 글로벌 존재감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미국 FDA 승인을 받은 중국 신약은 5개에 불과하다. 그중 3개는 지난해 이뤄졌다. 그나마 혈액암 치료제 ‘브루킨사’, 다발성골수종 치료제 ‘카빅티’는 효과 측면이나 매출 견인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 임상시험 결과가 유망한 중국의 신약후보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같은 결과를 입증할지는 미지수다. 시판에 이르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블룸버그는 “하지만 다국적 제약사들은 기꺼이 중국에 베팅하려 한다. 중국 제약업계가 가치를 입증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로슈는 중국 제약사 ‘레고르’의 암치료 후보물질 라이선싱 계약에 8억5000만달러 선불금을 냈다. 이 기업 CEO 토마스 쉬네커는 “지속적으로 중국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향후 수많은 혁신을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스티펄 파이낸셜의 이사 팀 오플러는 “중국은 짧은 기간에 상전벽해를 이뤘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전 중국 제약사들은 복제약을 생산하고 있었다. 심지어 올바른 재료를 쓰지 않는다는 우려까지 있었다. 중국에서 아스피린을 사면 실제 아스피린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며 “10년이 지난 현재, 중국은 진짜 좋은 약을 개발하고 있다. 미국 최고의 제약사들과 경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스트라제네카 갤브레이스 대표는 “블록버스터 약물을 기준으로 본다면, 중국은 아직 성공한 게 아니다. 하지만 제약학의 질과 혁신 수준으로 보면 중국은 이미 성공했다. 미래 그같은 약물을 개발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다국적 제약사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중 탈동조화에 우려감을 표했다. 로슈 쉬네커 CEO는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는 건 좋지 않다”며 “공급망 차질은 제약업계뿐 아니라 전세계 전체 산업에도 피해를 준다”고 말했다.
미의회가 추진중인 ‘생물보안법’은 중국의 특정 생명과학기업들이 미국 연방정부 자금지원을 받는 계약을 할 수 없도록 막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내 의약품 생산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다. 하원을 통과한 이 법은 연내 입법될 가능성이 크다.
블룸버그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내각 후보자들은 중국에 대한 강경 입장을 갖고 있다”며 “서구 제약사들과 중국의 협력이 강도 높은 검증대에 오를 수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