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과학, 호기심으로 시작하고 끈기로 완성하는 작품
“노벨 과학상, 그까짓 것쯤이야 이제 우리도”라고 얘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과학을 하는 필자를 포함하는 우리는 아직도 10월이 되면 몸살을 앓는다.
올해는 특히 더 그랬다. 한 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말 기쁘고 자랑스럽고 대단한 일이지만 과학을 하는 사람들로서는 또 다른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기도 하다. 평화상에 이어 문학상까지 받았는데 가장 투자를 많이 한 과학 분야는 왜 소식이 없는가라는 아쉬움 가득한 기다림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벨상은 중요한 연구업적을 발표한 후 평균적으로 20~30년 정도는 지나야 수상할 수 있다. 올해 생리의학상의 대상이 된 논문이 1993년에 발표된 것이니 30년 이상 걸린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우리나라도 그 무렵 세계적으로 주목할 기초연구 결과가 있었던가? 없었다. 그러니 당장은 아닐 것이다.
우리 과학계도 노벨상에 가까이 가 있어
우리나라는 언제쯤 노벨 과학상을 받게 될까? 이제 우리도 가까이 가 있다고 조금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노벨상을 보면 특히 그렇다.
필자의 전공 분야인 생리의학상을 먼저 살펴보자. 필자가 지난 30년간 연구해온 바로 그 예쁜꼬마선충에서 새로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작은 크기의 RNA(크기가 작아서 마이크로RNA라고 부른다)를 발견한 두 과학자가 수상했다. 그중 한 수상자의 대표논문 제1저자가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마이크로RNA에 어느 정도 친숙한 독자들은 한국의 과학자가 ‘마이크로RNA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밝힌 세계적 수준의 연구를 수행해오고 있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이 학자가 노벨상의 세번째 수상자가 되었어도 많이 어색하거나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벨 화학상은 어떤가? 올해 화학상은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3명의 과학자가 수상했다. 그중 한 수상자의 가장 중요한 논문 제1저자 역시 한국인이었다. 수상의 영예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노벨상 턱 밑까지는 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만큼 차분하게 기다리면 예상하지 못했던 쪽에서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기대해본다.
앞으로의 관전포인트를 들어본다면 노벨 과학상의 조건이 각 영역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물리학상의 경우는 발견과 발명, 화학상은 발견과 개선, 그리고 생리의학상은 발견에만 방점을 두라고 노벨의 유언장에 명시되어 있다. 물론 인류에 공헌해야 한다는 공통조건도 있다. 그리고 수상자 발표 당시 생존해 있는 연구자여야 하고 3인까지만 수상할 수 있다. 주요 연구자가 4명인데 3명으로 추릴 수 없다면 그들은 아예 못 받을 수도 있다.
기초과학에 인색한 한국의 연구 풍토
필자는 지난 9월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 평가를 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연구소측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데다 막스플랑크연구소는 노벨상의 산실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연구력을 보유한 연구기관이기에 평가자문을 하는 것만으로 영광스럽고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고 믿고 흔쾌히 승낙했다.
튀빙엔에 있는 생물학연구소가 필자의 평가대상 연구소였는데 이 연구소에는 단 6명의 연구책임자가 각자의 연구주제를 가지고 연구단을 자율적으로 운영해오고 있었다. 그 전공분야를 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한 연구단은 예쁜꼬마선충이 아닌 다른 종류의 선충에서 발생 단계에서의 형질다양성 연구를 25년간 해오고 있었고, 다른 새로운 연구단은 선충을 잡아먹는 곰팡이에 대한 연구를 독보적으로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연구실은 갈조류의 발생과 성 결정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면서 세계적 수준의 업적을 내고 있었다.
얼마 전 은퇴한 단장 중 한 사람이 초파리 발생 연구를 통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뉘슬라인 폴하르트 박사였다. 그는 초파리 연구로 노벨상을 받고 나서 곧장 물고기 발생 연구를 위해 이곳 튀빙엔에 공장 같은 수족관을 지어서 엄청난 물고기 돌연변이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이 수족관은 유지비로만 연간 3억~4억원 이상의 예산을 쓰고 있었다.
한마디로 필자는 기초 중의 기초연구를 장기적으로 투자하면서 지원해주는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철학을 현장에서 직접 읽을 수 있었다. 젊은 연구단장을 모시기 위해 여러해 동안 최대한 정성껏 찾고 설득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한번 모시면 정년과 연구비를 보장하는 등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하고 있었다. 가히 기초연구의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발견은 한국인은 그 연구소에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아무도 관심을 가져줄 것 같지 않은 선충이나 갈조류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하면 굶어 죽기 딱 알맞은 곳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았을까. 그것이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자 현주소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노벨상은 이런 곳에서 나오는데 말이다. 독일에는 이런 연구소가 80군데 이상 있고, 긴 호흡의 독창적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단이 300개 정도 있다. 각각이 노벨상 후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연구자들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빅터 앰브로스와 개리 루브컨 박사는 원래 노벨상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연구를 시작했다. 예쁜꼬마선충은 수정란에서부터 성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포들의 분열과 계보가 밝혀진 유일한 동물인데, 이 특징을 이용해 그 계보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잘못된 돌연변이를 찾아서 연구를 시작했다. 발생과정의 공간적 조절에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질 때 이들은 시간적 조절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필자가 아직도 기억하는 장면은 한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발생의 시간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찾았는데 그 유전자가 일반적으로 가진 단백질을 만들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난감하다는 것이었다. 집요한 연구 끝에 이 유전자는 단백질로 만들어질 정보가 아니라 RNA까지만 만들어지는 정보를 담고 있었고 그 크기 또한 아주 작아서 마이크로RNA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불과 1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이런 모양의 마이크로RNA가 선충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고, 발생 과정의 조절에 다양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제로 사람의 질병 원인 유전자 중에도 마이크로RNA가 있음이 확인됐다.
노벨 생리의학상도 30년 연구의 결과
이 대단한 발견은 인간에 유익함을 갖춰야 한다는 노벨의 유언에 적확히 부합하는 업적으로 인정받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시작은 조촐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창대해졌다. 이런 연구가 성공할지는 미리 짐작할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훌륭한 과학은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고 끈기로 완성한다는 것이다. 긴 호흡으로 호기심 기반 연구를 끈기 있게 해나가는 곳에 미래가 있다.
최근 대단한 연구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뇌 커넥톰 연구 분야다. 마침 노벨상 발표가 나는 10월 첫주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에 9편이나 되는 논문이 한꺼번에 발표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정도였다. 커넥톰이란 뇌 속의 신경세포들의 모든 연결(시냅스라고 부른다)의 총합을 의미하며 뇌의 초정밀 지도라고 보면 되겠다.
이전에는 302개 뉴런을 가진 예쁜꼬마선충이 유일한 커넥톰 보유 동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수준을 14만개의 뉴런과 그들이 구성하는 5000만개 이상의 시냅스로 구성된 고도로 조직된 초파리 뇌까지 끌어올렸다. 이러한 정밀지도는 뇌과학 연구의 지평을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넓혀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 과학자들이 중심 역할을 했고 앞으로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미래는 이미 훌쩍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부담보다는 기대를 더 크게 가지게 되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