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저지른 범죄 반성하는 캐나다정부

2024-11-06 13:00:02 게재

원주민 기숙학교에 강제 수용됐던 어린이 수천명 사망 … 4년 전 국가추모일로 지정

‘진실과 화해의 날’에 원주민 피해자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

9월 30일은 캐나다의 국경일 ‘진실과 화해의 날(National Day for Truth and Reconciliation)’이었다. 2021년 처음 제정됐으며, 올해 네번째 기념식이 수도 오타와를 비롯해 캐나다 전역에서 열렸다. ‘진실과 화해의 날’은 국가적으로 저지른 ‘원주민 기숙학교’ 범죄에 대해 함께 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려는 캐나다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1880년부터 1996년까지 캐나다에는 원주민 어린이들을 위한 기숙학교 139곳이 운영됐다. 영어와 백인들의 문화를 가르치겠다는 의도였다. 가톨릭교회를 비롯해 여러 기관에서 운영했는데, 15만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기숙학교에 강제 수용됐다. 그곳에서 6000여명, 어쩌면 그 이상의 학생들이 질병으로, 또는 각종 사건사고와 학대를 당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와 종교가 공모한 범죄”

올해 ‘진실과 화해의 날’에는 오타와의 캐나다역사박물관(Canadian Museum of History)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조각가 스탠리 C. 헌트가 만든 원주민 기숙학교 추모비(Indian Residential School Memorial Monument) 제막식이 그것이다. 헌트 씨의 부모는 BC주에 있던 기숙학교 출신이었다.

그는 거대한 붉은 삼나무를 깎아 추모비를 만들었다. 어린이들의 얼굴은 주황색 테두리로 둘러싸인 사각형 액자에 담겨 있고, 단풍잎과 경찰을 뜻하는 ‘RCMP’ 글자, 십자가는 모두 거꾸로 새겨졌다. “경찰 교회 연방정부가 기숙학교 범죄에 공모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뒤집혀 있다”고 헌트 씨는 CBC뉴스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이날 토론토시는 시청광장 한켠에 ‘원주민 영혼들의 정원’을 열었다. 기숙학교 생존자들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모든 아이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정원의 석회암으로 만든 큰 거북이 조각상 주변에는 퍼스트네이션(First Nation), 메티스(Métis), 이누이트(Inuit) 등 원주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들이 둘러싸고 있다.

정원 개소식에 참석한 기숙학교 생존자 앤드류 웨슬리 씨는 “정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기숙학교 생존자들이 겪었던 학대와 세대 간 트라우마뿐만 아니라 토론토와 그 주변에 사는 원주민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올리비아 차우 토론토 시장은 “이곳은 역사에 대한 성찰과 문화행사, 영적 의식을 위한 장소이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고 말했다.

성폭력에다 영어 안 쓰면 매까지 맞아

기숙학교 생존자인 고든 번스틱 씨는 어린 시절 앨버타주 에드먼튼 북쪽에 살았다. 그는 학창시절인 1960년대 그곳의 기숙학교에서 3년 정도 머물렀다.

번스틱 씨는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면서 “그 학교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학대를 당했는데, 그중에는 성적인 학대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원주민 언어를 쓰면 체벌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학교에서 도망쳤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음주 관련 문제가 생겼고, 평범한 삶이 어려워졌다.

작가이자 교수인 솔로몬 래트 씨도 여섯살 무렵부터 캐나다 중부에 있는 한 기숙학교에서 지냈다. 현재는 퍼스트네이션스대학교(First Nations University of Canada)의 명예교수로 일하는 래트 씨는 CBC라디오 인터뷰에서 “기숙학교에서는 학대와 방치가 만연했고, 수천명의 아이들이 질병 영양실조 자살 등으로 사망했다”면서 “이런 역사적 사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런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래트 교수는 자신이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경험을 청취자들과 나눴다. 그것은 자신의 조상들과 부모들이 사용하던 문화와 언어의 회복이었다. 캐나다는 기숙학교를 통해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없애고 ‘백인화’ 시키려 했으나 그 피해자들은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더욱 더 집중하려는 것이다. 래트 교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는 우리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래트 교수의 조상들이 사용하던 언어는 ‘크리(Cree)어’다. 그는 캐나다 중부 사스캐처원의 시골 통나무집에 얽힌 추억을 꺼냈다. 겨울 밤을 보내며 형제들과 함께 아늑하게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가 영어가 아닌 ‘크리어’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집안에는 부모와 자식을 위한 별도의 방이 없었다. 오두막 구석에는 난로가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담요를 덮은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고, 잠들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됐다”고 말했다. 주로 크리족의 민족 영웅 위사케카크(Wisahkecahk)와 그들의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트리 교수는 지난해 펴낸 책 ‘내가 기억하는 법(The Way I Remember)’에서 “기숙학교 강사들이 했던 이야기들 가운데 칭찬이라고 받아들였던 것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완전한 인종차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적었다. 그 이후로 래트 교수는 자신들의 이야기와 언어를 후손들에게 다시 들려주며 가르치는 데 헌신하고 있다.

그는 또한 기숙학교 기억을 더듬어 영어와 크리어로 짧은 글을 SNS에 올리고 있는데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고 활성화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캐나다정부 훈장을 받았다.

역사 부정하려는 시도에 “법 개정해 처벌”

기숙학교의 어두운 구석을 파헤쳤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는 수년에 걸친 철저한 연구와 검토 끝에 지난 2015년 보고서를 냈다. 그곳에서 자행됐던 학대와 방치,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사망한 어린이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망원인의 으뜸을 차지한 건 결핵 등 질병이며, 1918~1919년에는 스페인독감으로 숨진 원생들도 많았다. 화재, 익사 등 사고사도 계속됐던 것으로 진상조사 결과 드러났다.

원주민 아이들을 지배적인 ‘유럽-백인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이 학교들은 세대 간 트라우마와 피해를 입혔다고 위원회는 지적했다. 진상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연방정부와 관련 기관들은 공식 사과했다.

저스틴 트뤼도 연방총리는 올해 ‘진실과 화해의 날’ 성명에서 “캐나다정부는 원주민 공동체와 함께 치유의 여정에 동행하는 데 힘쓰고 있으며, 필요한 모든 곳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연방정부는 거의 사멸된 원주민 언어를 되살리고 활성화하기 위한 예산을 제공했고, 원주민 어린이들의 복지를 위한 지출에도 과감히 나서고 있다. 식수난을 겪고 있는 오지 원주민들의 건강관리 분야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연방정부는 기숙학교에서 숨진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1억1600만캐나다달러(1100억원) 이상을 투입했으며, 지난 3월 기준 146개 사업에 2억1600만달러를 제공했다. 발굴되지 않은 어린이들의 무덤을 찾기 위한 작업에도 연간 4550만달러를 배정했다.

하지만 캐나다 내부의 모든 구성원들이 원주민 기숙학교의 흑역사에 대해 반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린 베야크 전 상원의원은 TRC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온 뒤 “보고서는 ‘선의를 가진’ 종교 교사들이 이룩한 선행을 간과했고, 지나치게 부정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췄다”며 “기숙학교에서 그 어느 누구도 어린 학생들을 해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그는 상원의원에서 사임했다.

우익 성향의 뉴스사이트인 ‘트루 노스’에도 최근 기숙학교를 옹호하는 듯한 글이 올라왔다. “급속히 현대화하는 문명사회에 원주민들이 잘 적응하도록 돕는 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 노력 자체는 고귀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야당인 신민당(NDP)이 최근 형법 개정안을 냈다. 기숙학교의 어두운 역사를 부정하거나 사실을 왜곡하고, 원주민에 대한 증오를 고의적으로 조장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캐나다통신에 따르면 법안을 발의한 레아 가잔 하원의원은 “개정안은 생존자들과 그 가족들을 증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용호 언론인 캐나다 토론토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