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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징검다리 집권, 미국은 어디로 가나

2024-11-08 13:00:01 게재

트럼프의 승리이지만 더 정확하게는 해리스의 패배다. 2024년 제 4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인단 312명은 물론 일반 투표에서도 51%를 거두면서 보란 듯이 미국 역사상 두번째로 ‘징검다리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다.

중도성향의 유권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친공화당계 인사들의 끝없는 조언에도 아랑곳 않고 극우 성향의 JD 밴스(James David Vance)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음은 물론, 선거 막바지 유세에서 미국령(領) 푸에르토리코를 가리켜 “쓰레기 섬”이라고 외쳤지만 트럼프의 승리에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결국 할 줄 아는 건 ‘활짝 웃는 것’뿐이라는 비난을 받는 민주당 해리스 후보의 패배가 더 커 보이는 상황이다.

철 지난 ‘낙태이슈’에만 집착한 해리스

국내는 물론 미국 내 전문가들에게도 이번 선거처럼 예측하기 어려웠던 사례는 없었다. 본 지면을 통해 두 가지를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지난 8월 22일(현지시각)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해리스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트럼프를 대놓고 싫어하는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보도했었다. “보통 전당대회를 치르고 나면 대통령 후보에게 쏠리는 관심, 이른바 컨벤션 효과가 한달 정도인데 해리스의 후보 지명 과정은 워낙 다이나믹해서 컨벤션 효과가 8주 정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니, 해리스는 그 효과가 끝나는 시점을 조심해야 한다.”

‘다이나믹한 과정’은 바이든 대통령 사퇴 전후로 오바마 전 대통령과 수차례 전화통화를 나눴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보이지 않는 사퇴 압박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7월 13일(현지시각) 이번 선거의 최대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외곽 도시 버틀러에서 트럼프가 피격을 당하는 사건을 포함한다. 참고로 이미 오래전 얘기가 되었지만 피츠버그는 ‘웨스팅하우스’와 ‘유에스스틸’의 본부로서 여전히 미국인의 마음속에 굴뚝산업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대략 8주가 지난 시점인 10월 둘째주 전후로 트럼프에 다시 초점을 맞추면서 공화당 후보가 해리스를 초접전으로 추격하거나 따돌리기 시작했다는 뉴스 보도가 앞다퉈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두 후보 간 초접전은 이미 예상된 상황이었고, 해리스 부통령은 여기에 충분히 대응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미국 저소득층을 질식하게 만드는 초고(超高) 인플레이션, 북한의 파병으로 점입가경이 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중동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미국을 향한 반격의 기회만을 엿보는 중국에 대한 정책 등. 미국 대선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필자는 이들 이슈 중에서 해리스는 어떤 해법을 내놓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언론의 관심을 끌었던 해리스 정책은 ‘낙태금지’ 폐기가 거의 유일했다는 점이다. 2022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한번 재미를 봤던 이 이슈는 이번 대선에서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선거 기간 내내 겉돌았다. 어젠다 세팅 능력이 뛰어난 트럼프에 맞서 동일한 어젠다를 놓고서 더 나은 정책을 제시하는 경쟁을 했어야 하는데 ‘낙태법’이라는 어젠다는 전국적으로 유색인종의 투표율이 중요한 대선에서 힘을 발휘 못한 것이다.

결국 최종 결과에 의하면 무려 3620만표에 달하는 라틴계 유권자 중에서 해리스는 남성 유권자에게서는 당연히 패배했고, 라틴계 여성 유권자의 겨우 트럼프에 비해 24%p 정도 앞섰다. 이조차도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이 얻었던 39%p보다도 확연히 줄어든 수치다. 물론 해리스는 이스라엘 휴전 촉구, 보편적 의료보험 확대, 저소득층 지원금 확대 등 많은 정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유권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정책을 전달하는 해리스의 콘텐츠와 방식 모두에 문제가 많았다.

일반 국민투표 3~4%p 차이는 의미 없어

둘째, 5일(현지시간) 치러진 선거는 일반투표이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오는 12월 17일 선거인단 투표를 통해 대통령 당선자가 최종 결정된다. 그리고 내년 1월 6일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최종 승인을 받는 방식이다. 50개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수는 총 538명(워싱턴 D.C. 3명 포함)인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50개 주를 공화당 대 민주당으로 양분하는 방법은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미국에도 공산당 사회당 심지어 무정부주의정당이 있다. 하지만 미국 상하원은 공화 민주 양당이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538명의 선거인단을 둘로 나누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양분된 건 대략 30년쯤 됐다. 즉 캘리포니아에 할당된 선거인단 54석은 무조건 민주당 성향, 텍사스에 할당된 40석은 무조건 공화당, 워싱턴주 12석은 민주당, 캔자스 및 사우스캐롤라이나 17석은 공화당, 이런 방식인 것이다.

여기서 예외적으로 선거 결과가 매번 바뀌고 예측이 어려운 주를 가리켜 ‘스윙주(swing states)’라고 일컫는다.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니아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애리조나 네바다 이렇게 7개 주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양당이 50개주를 나눠 갖는 현실에서 일반 국민 투표 3~4%p 차이는 선거인단 투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지난 8월부터 10월 초까지 해리스 후보가 유지했던 3%p 내외의 우위는 선거인단 투표 결과로 전환되지 못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우위였던 것이다.

정체성 변화 반영한 트럼프의 의제설정

문제는 지금부터다. 트럼프를 또 한번의 지도자로 선택한 미국은 이제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폴란드 출신의 작가 헨리크 셍키에비치가 지은 역사소설 ‘쿠오바디스’는 수천년 전 로마 네로 황제의 탄압에 실망한 로마 시민의 외침을 잘 담고 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미국 국민들은 트럼프를 미국이라는 거대한 항공모함의 선장으로 선택했는데 미국이 국내외적으로 어떤 정체성을 가지길 원하는 것일까. 트럼프 당선자는 이미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법인세 대폭 감세, 대중국 투자 금지, 에너지산업 활성화, 이민자 정책 강화 등을 포함해 대통령 권한의 대폭 강화가 그 핵심이다. 이들 정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하나는 나름의 논리적 설득력을 가진다.

과거 미국의 힘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미국이 제공한 ‘국제 공공재’는 전 세계 질서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핵심 기반이었다. 지금 미국의 힘은 과거와 다르고 국제사회 현안에 투입할 수 있는 리소스가 거의 바닥난 상태라는 점을 고려할 때 트럼프의 의제설정은 매우 적확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글로벌 지위가 쉽게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지위 하락으로 인해 발생하는 글로벌 힘의 공백을 중국은 물론 그 어느 특정 국가가 고스란히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힘의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일부는 중국이, 일부는 국제기구가, 일부는 유럽과 일본이, 또한 일부는 한국을 포함한 경쟁력을 갖춘 모든 국가가 메우고 있는 현실이다.

결과적으로 이른바 최고 패권국가 미국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와 연동돼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 축소는 다양한 연결 과정을 거쳐서 미국의 정체성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모든 걸 시혜적으로 해결할 거라는 생각은 이제 시대에 맞지 않다.

벌써부터 호사가들은 4년 후의 질문을 제기한다. 과연 트럼프 당선자는 2028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있는가. 미국 수정 헌법 조항을 들여다보면 다소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세 번 당선’에 초점을 맞춘 해석에 의하면 2028년 출마는 불가능하고, ‘연이은 당선’에 초점을 맞춘 해석에 의하면 출마가 가능할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건 트럼프 당선자가 가져올 미국 국가 정체성 변화는 향후 오랜 파장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 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