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경제활력 실종, 예삿일 아니다

2024-11-18 13:00:09 게재

더 강력해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깃발을 내건 도널드 트럼프가 47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전세계에 비상이 걸렸다. 선거기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관세(tariff)”라며 중국(최고관세율 60% 부과)은 물론 우방 국가들에도 10%의 보편관세를 신설하겠다고 공언하는 등 모든 국가들을 대상으로 ‘무역전쟁’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미국시장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대책 마련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 다음으로 큰 수출시장이 미국이다. 트럼프 2기 정부가 별러온 대로 중국에 ‘관세폭격’을 가할 경우의 ‘유탄’도 만만치 않다. 한국의 대중 수출품목 가운데 상당수가 대미 가공수출용 부품과 반제품이 많아서다. 이중타격을 받는 게 불가피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트럼프 당선인을 만나서 친교와 대화를 할 시간을 잡기로 했다”며 대응책을 주문한 배경이다.

기업 혁신능력 저하, 노동생산성 악화 등으로 경제활력 위축

그러나 대한민국 경제가 처한 상황은 외교이벤트와 대증적(對症的)인 통상대책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엄중하다. 무엇보다도 기업들의 수출동력 자체가 꺾이고 있다. 지난 3분기 수출이 전분기보다 0.4% 줄어든 게 단적인 예다. 자동차와 2차전지 화학제품 등의 수출이 부진했던 데다 반도체 등 주력 IT(정보기술)품목 수출증가율도 하향세를 나타냈다.

부진했던 내수소비가 살아날 조짐을 보인 반면 그동안 우리 경제를 지탱해 온 수출이 뒷걸음질 쳤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이로 인해 3분기 한국은 ‘제로(0) 성장’에 가까운 0.1% 성장에 머물렀다. 글로벌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한국이 경제엔진이었던 수출이 감소하면서 성장동력을 잃고 있다”고 경고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더 심각한 것은 잠재성장률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추정한 한국의 올해 잠재성장률이 지난해와 같은 2.0%로 내려앉았다. 2020~2021년 2.4%에서 2022년 2.3%로 하락한 데 이어 계속 미끄럼을 타고 있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가 노동·자본·자원 등 동원할 수 있는 생산요소를 모두 투입해 물가상승 등 부작용 없이 최대로 이뤄낼 수 있는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경제 기초체력이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의 경제체질이 얼마나 ‘저질’인지를 보여주는 비교지표가 있다. 미국의 작년과 올해 잠재성장률(2.1%)이다. 잠재성장률은 한 나라의 경제구조가 성숙해지고 덩치가 커질수록 둔화하는 게 상식이다. 미국은 인구(3억4500만명)가 한국(5170만명)보다 6.7배 많고, 1인당 소득(미국 8만5000달러, 한국 3만6000달러)은 2.36배 높다. 국내총생산(GDP)이 한국보다 15배나 많다. 그런 나라보다 잠재성장률에서 밀린다는 건 충격적이다.

한국의 경제체질이 이렇게까지 허약해진 원인으로 흔히 저출생·고령화를 꼽는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경제주체인 기업들의 혁신능력 저하와 투자 소홀, 노동생산성 악화 등이 겹쳐지면서 경제활력이 위축되고 있는 탓이 크다. 최근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진 증권시장이 한국 기업들의 활력 실종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몇몇 손에 꼽을 기업들 외에는 국내외 시장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다보니 이들 기업의 실적에 따라 주가시세 전반이 출렁이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중국 유럽 일본 등 해외 증권시장이 약세를 보이면 어김없이 동반하락하지만, 이들 증시가 회복세를 탈 때 상승동력을 얻지 못한 채 ‘나홀로 부진’에 빠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 증시는 석 달 전의 ‘블랙먼데이(글로벌 증시 동반 하락)’ 이전 수준을 아직도 회복하지 못한 채 G20(주요 20개국) 가운데 전쟁 중인 러시아와 튀르키예 다음으로 부진한 상태다.

정부와 정치권이 모처럼 ‘증시부양’ 나섰지만 힘 못 써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끌어내리고 야당인 민주당이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에 동의키로 하는 등 정부와 정치권이 모처럼 ‘증시부양’에 힘을 합치고 있는데도 별 효과를 못 내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성장성에 의구심을 가진 국내외 투자자들이 한국증시를 떠나고 있어서다. 기업들의 기력이 빠진 상황에서 ‘트럼프 이후의 대미 수출대책’을 세워봤자 제대로 된 효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다. 전체 상황을 면밀하게 짚어내서 시의에 맞는 대책을 내놓는 일이 시급하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