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찬 칼럼

중앙은행의 역할과 독립성

2024-11-27 13:00:09 게재

2008년과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진행되던 때 필자는 미국 유럽 아시아의 중앙은행 금융규제기관 재무부 금융회사 연구기관들을 돌아다니면서 정책결정자 시장참여자 연구자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며 금융시스템의 취약점과 개선책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금융위기는 다수의 기업들이 빚을 갚지 못해 금융기관들이 이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빈번한 금융위기를 막지 못하는 큰 이유를 필자는 거시경제를 운용하고 금융시스템을 규제하는 사람들에게 실물시장과 금융시장 간의 화폐를 매개로 하는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후기케인즈학파 경제학자인 하이먼 민스키는 거시적 경기상황과 금융기관의 행태를 연관지어 금융위기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얘기하기 전에 실물과 금융의 상호작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경제학 모델이 아직 없다.

금융시스템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은 화폐를 발행하고 유통량을 조절하는 기관으로서 그 가장 큰 임무는 물가안정이다. 이와 관련된 임무인 금융시스템 안정은 중앙은행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다른 금융규제기관들과 협업해야 이룰 수 있지만 중앙은행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 나라에 따라서는 고용 경제성장 등이 중앙은행의 부가적인 임무로 법적으로 부여되기도 한다.

중앙은행이 정치적 독립성을 갖지 못하면

2008~2009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중앙은행이 하는 일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중앙은행은 민간은행들의 은행으로 민간은행에게 돈이 필요할 때 빌려주는 일을 해왔다. 이를 최종대부자 기능이라고 한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시스템은 비금융 회사나 기관에서 발행한 채권을 매입함으로써 금융기관들을 넘어서 실물부문에 직접 자금을 공급했다. 이는 1930년대 공황 당시 중앙은행이 제대로 역할을 못한데 대한 반성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장기적 경제침체로 이어지는 걸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중앙은행이 민간은행들을 살리고 민간은행들은 기업을 살린다는 전통적 공식이 무너졌다.

미국 중앙은행은 글로벌금융위기 당시 미국뿐만 아니라 자금경색을 겪는 다른 나라에도 자금을 공급했다. 글로벌 경제에 글로벌 중앙은행이 없는 현실에서 미국 중앙은행이 그 역할을 일부 수행한 것이다. 이는 달러가 국제거래에서 사용하는 통화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중앙은행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책결정에 있어서 독립성이 필요하다. 그런 중앙은행은 무소불위가 아니다. 중앙은행이 의회의 감독을 받고 행정부와 정책조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앙은행이 잘못된 정책결정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00년대 말 글로벌 금융위기도 경기호황 국면에서 미국 연방준비이사회의 느슨한 금융정책이 오래 지속되었던 게 큰 원인이다. 2000년대 중반 한국은행 총재는 이자율을 전반적 경기조절의 수단으로만 여기고 부동산가격은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고 대출규제로 부동산가격 급등을 막는 일이 반복되었다.

필자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상임위 활동할 때 부동산 가격급등 문제를 다루면서 한국은행이 선제적으로 이자율을 조정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후임 한국은행 총재에게 던진 적이 있었다. 그는 고민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답변했던 기억이 난다.

중앙은행이 무소불위도 아니고 무오류도 아니지만 중앙은행의 정치적 독립성은 중요하다. 지난 이십여년 간 일본은행은 행정부의 경제정책 방향과 지나칠 정도로 보조를 맞추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는데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한국은행은 외환위기 이전에는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라고 불릴 정도로 행정부에 휘둘렸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통합금융감독기구가 생겨나고,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존중되고, 민간이 주도하는 금융산업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경제가 글로벌금융위기를 헤쳐나가고 선진경제로 올라서는 데는 외환위기 직후의 금융개혁이 한몫했다.

일관된 방향성과 안전성이 중요한 이유

왜 행정부가 운용하는 재정정책의 정치적 독립성은 이야기되지 않고 중앙은행이 운용하는 금융정책의 정치적 독립성만 이야기되는가. 재정정책 특히 재정지출은 다양한 현안문제 해결과 연관되어 있어 정부의 재량적 정책결정이 작동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경제전체에 유통되는 화폐와 신용의 총량을 조절하는 금융정책에서는 마치 배가 별자리를 보고 항해하듯이 일관된 방향성과 안정성이 중요하다. 물론 재정지출에서도 총량지표에 대해서는 안정성 있는 운용이 바람직하다.

중앙은행은 평시에도 위기상황에서도 경제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 역할이 변화될 수밖에 없지만 정치적 독립성은 유지되는 게 바람직하다.

재수찬 카이스트 교수 경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