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정부, 불신임 표결로 붕괴 위기
총리, 사회보장재정법 ‘하원 표결 패싱’ 강행 … 좌·우파 야권 “정부 무너뜨릴 것”
여야 격돌의 소재는 사회보장 재정법안이다. 미셀 바르니에 총리는 2일(현지시간) 사회보장 재정법안 심사가 열리는 하원에 출석해 헌법 조항을 발동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밝혔다.
사회보장 재정안은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가족 지원 등 각종 사회보장 시스템의 재정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예산안이다.
야당인 좌파 연합 신민중전선(NFP)과 극우 국민연합(RN)은 사회 복지 축소와 프랑스인들의 구매력 감소 등을 우려하며 일부 법안에 반대해왔다.
야당의 반대로 의회 통과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자 바르니에 총리는 하원 표결을 건너뛰고 바로 입법할 수 있는 헌법 조항을 꺼내들었다.
프랑스 헌법 제49조3항은 정부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때 국무회의 승인을 받은 법안을 총리의 책임 아래 의회 투표 없이 통과시킬 수 있게 한다. 앞서 정년 연장을 골자로 한 프랑스 국민연금 개혁안이 이런 방식으로 통과된 바 있다.
바르니에 총리는 “나는 (취임 당시) 우리가 직면한 제약에 대해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프랑스는 사회 보장 재정 법안과 내년도 예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이 “정치 그룹들과의 대화를 끝까지 이어갔다”고 강조했다.
바르니에 총리는 이와 함께 “프랑스 국민은 국가의 미래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것이 제가 헌법 49조3항에 근거해 법안 전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당들에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미래”를 우선시하는 책임을 보이라고 촉구했다.
야당의 반대로 해당 법안이 하원 표결을 통과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의회 패싱’이란 극단적 경로로 돌파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야당인 NFP와 RN은 즉각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RN의 마린 르펜 하원 원내대표는 “바르니에 총리는 1100만 유권자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며 “우리는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하고 투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르펜 대표는 특히 다른 정치 진영이 불신임안을 발의하더라도 이에 찬성표를 던지겠다는 뜻까지 밝혔다. 정치적 스펙트럼의 대척점에 있는 좌파 진영의 발의안에도 동조하겠다는 뜻이다.
르펜 대표는 “총리는 앞서 의회 내 모든 그룹, 특히 가장 큰 그룹의 입장을 고려해 예산을 편성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며 정부가 RN의 요구를 무시한 채 불공정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고 비판했다.
좌파 진영도 정부를 끌어내리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NFP도 정부의 헌법 제49조3항 발동을 비난하며 “이 불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바르니에 이후엔 마크롱 차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극좌 정당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마틸드 파노 원내대표는 “민주주의에 대한 엄청난 부정에 직면해 우리는 정부를 불신임할 것”이라며 “바르니에 총리는 가장 짧은 임기를 가진 총리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프랑스 헌법상 불신임안은 발의 시점부터 48시간이 지난 후에 표결이 가능한 만큼 이르면 4일 오후 표결이 이뤄질 전망이다.
불신임안은 하원 재적의원의 과반수 찬성이 있어야 가결된다. 하원 전체 재적 의원은 577명이지만 현재 2자리가 공석이라 가결 정족수는 288명이다. 현재 하원 구성상 좌파 연합과 RN 및 동조 세력 의석수를 합하면 300석이 훌쩍 넘는다.
불신임안이 통과되면 바르니에 정부는 즉각 총사퇴해야 한다. 바르니에 정부가 들어선 건 지난 9월로, 내각이 해산할 경우 5공화국 사상 최단 집권한 정부로 기록될 전망이다. 임기를 2년여 남긴 마크롱 대통령도 정치적 치명상이 불가피하다.
프랑스 제5공화국 이래 정부가 의회의 불신임을 받아 해산한 경우는 1962년 조르주 퐁피두 총리 때가 마지막이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