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섬백길 걷기여행 11 통영 한산도 역사길

이순신 장군이 걷던 그 섬길을 걷다

2024-12-06 13:00:06 게재

한산도는 조선 최초의 수군 사령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섬이다. 백섬백길 10코스인 한산도 역사길은 임진왜란 당시 군사작전과 훈련을 위해 이순신 장군이 지나다니던 옛길을 복원한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영 주둔지였던 제승당을 출발해 대촌삼거리, 망산 인도교, 망산 숲길을 지나 한산면 소재지인 진두항까지 이어지는 7.4㎞의 트레일이다. 산길은 제법 가파르지만 망산 정상에서 펼쳐지는 한려수도 풍경은 선경이라 할만큼 아름답다.

통영 한산도. 사진 섬연구소 제공

경상·전라·충청도 3도의 수군 총사령관이었다던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 장군이었다. 1593년(선조 26) 8월 임진왜란 중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1597년 2월, 파직될 때까지 한산도에 주둔한다. 7년 전쟁 중 3년 8개월을 한산도에 머물렀으니 섬은 가히 장군의 섬이라 이를 만하다.

그래서 통영 사람들은 한산도에 이순신 장군의 혼백이 서려 있다고 믿는다. 한산도의 지명들은 모두가 임진왜란과 관련이 깊다. 진두(陣頭)마을은 조선 수군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다. 창동(倉洞)은 군수창고가 있던 곳이고 염개(鹽浦)는 소금을 만들던 곳이다. 망산(望山)은 왜적의 동태를 살피며 망을 보던 곳이고 대섬은 화살의 재료인 대나무를 조달하던 곳이다.

왜군의 시체를 매장했다는 곳은 왜매치, 조선군이 신호로 고동을 불었다는 곳은 고동산이다. 장군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갑옷을 벗고 땀을 씻었다는 섬은 해갑도다. 의암(衣巖)마을은 군복을 만들던 곳이고 야소(冶所)는 무기를, 여차는 병선을 수리하던 곳이다. 두억개는 왜적의 머리를 수도 없이 베었다는 곳이다. 어느 하나 그 시절의 시연이 깃들지 않은 지명이 없다.

문화재(사적)로 지정된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통칭 제승당)에는 제승당 영당 충무사 수루 한산정 등의 건물이 있지만 이순신 장군 당시에 지은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주둔하던 수군 진영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렸다. 왜군의 수중에 넘어갈 것을 우려한 조선 수군이 퇴각하면서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영조 15년(1739년)에 이르러서야 107대 삼도수군통제사 조경이 운주당 옛터에 다시 건물을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 지었다. 운주당이란 이순신 장군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불렀던 이름이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진(陣)을 친 이후 늘 이 집에 기거하면서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머무는 동안에는 큰 전투가 없었다. 세력균형 상태가 지속됐다. 당시 한산도에는 판옥선 150여 척이 있었고 1만5000~2만명 정도의 수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승당의 수루에서는 한산도 앞바다를 지나가는 배들을 환히 다 지켜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배들에서는 한산도 진영을 엿볼 수가 없다. 해갑도란 섬이 가로막고 있어서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다.

수루(戌樓)는 정자만 하나 딸랑 남아있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난중일기에 수루에 도배를 하고 잠을 잤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망루뿐만 아니라 숙직할 수 있는 방도 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루는 한산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군사기지 어디에나 있던 망루다. 그래서 과거에는 군에 가는 것을 수자리 살러간다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한산도가(閑山島歌)> 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지만 서지학 전문가 이종학 전 독도박물관장은 “장군이 1597년 보성 열선루에서 한산도를 바라보며 지은 한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를 어디서 지었든 시 속의 ‘수루’는 오늘 한산도의 바로 그 수루임이 분명하다.

백섬백길: https://100seom.com공동기획: 섬연구소·내일신문

강제윤 사단법인 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