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2024 동남아 - 두세대 만에 다시 출현한 ‘정치적 쇠퇴’

2024-12-12 13:00:02 게재

우리나라에서 12.3 비상계엄이 일어나기 열흘 전 우리와 가장 인접한 동남아국가 필리핀에서는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충격적인 보도가 터져 나왔다. 현직 부통령 사라 두테르테가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와 친척인 하원의장을 암살하기 위해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했다는 보도였다.

아무리 폭력과 총기가 난무하는 필리핀이라고 할지라도 현직 부통령이 현직 대통령을 암살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내란 상태의 나라가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두테르테는 자신의 비서실장이 의회를 모욕한 혐의로 하원의 한 위원회에 의해 체포·구금된 것에 격분한 나머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연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이 엄청난 폭탄발언을 던진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만약 내가 죽는다면 BBM(마르코스 대통령), 영부인 리사 아라네타, 마르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대통령 외사촌 동생)을 죽여버리라고 말했죠. 농담이 아니에요, 나는 그들을 죽일 때까지 멈추지 말라고 말했고 그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어요.”

발언이 매우 단정적이라 누가 들어도 두테르테가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한 게 아닐까라는 강한 의심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라 두테르테는 마약 거래인들과 상습범 수천명을 재판 없이 처형한 전직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딸이자, 본인 또한 다바오 시장 시절 만인이 보는 앞에서 법원공무원을 주먹으로 구타하는 등 과격한 성향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핀, 부통령이 대통령 암살 공언

실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한달 사이에 두테르테는 이미 수차례 대통령과 그 일가에 극심한 악담을 퍼부었다. 내용인즉 당선되면 쌀값을 1kg에 20페소(500원)로 떨어뜨리겠다는 제일 알려진 공약조차 지키지 않은 거짓말쟁이다, 대통령의 무능이 극에 달해 지금 필리핀은 지옥을 향해 가고 있다, 만약 자신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계속한다면 대통령의 아버지인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무덤을 파헤쳐 그 유골을 필리핀 앞바다에 뿌려버리겠다, 심지어 대통령의 목을 따는 꿈을 꿨다 등, 언어의 폭력성이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청부살인 발언이 나오자 그 이전까지는 점잔을 빼고 있던 마르코스 대통령조차 반응을 보였고 의회 경찰 법무부 국가안전보장회의 국가수사국 등 국가안보와 국민안전을 책임 지는 거의 모든 국가기관들이 부통령을 소환조사하거나 수사하겠다고 나섰다. 급기야는 탄핵을 위한 고발조치까지 나왔다. 봇물처럼 터져 나온 비난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남쪽 절반을 커버하는 대표성, 대통령을 앞서가는 인기, 아버지인 전직대통령의 후광을 향유하는 사라 두테르테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천국의 결혼”이라고까지 불렸던 마르코스-두테르테 선거동맹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청부살인 발언만큼이나 심각하면서 흥미로운 사건들이 있다. 정치왕가 간의 이익 충돌, 전현직 대통령 간의 외교와 정책 차이, 차기 대통령직을 둘러싼 정치적 대결 등 복합적 요인이 그것이다.

이 에피소드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최근의 정치적 경향과 추세다. 이는 필리핀 정치나 한국 정치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탈냉전 이후 다른 대안이 없는 체제로 간주되었던 민주주의가 당면하고 있는 최대 위기에 관한 것이다.

조코위 10년, 인도네시아 민주주의 후퇴

두테르테 사건으로부터 한달 더 거슬러 올라 간 10월 20일, 인도네시아에서는 역사상 최고 인기를 누리던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이 5년씩 두차례, 10년의 긴 임기를 마치고 차기 대통령 쁘라보워 수비안또에게 권력을 넘기는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대중적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또 무사히 임기를 마치는 것은 민주주의의 당연한 작동 양태이지만 안타깝게도 조코위의 대통령직 수행도 쁘라보워의 대통령 당선도 인도네시아 민주주의가 진전하고 있음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 반대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는 지난 10년간 오히려 뒷걸음질쳤다는 것이 정치학자들의 공통된 평가다.

조코위는 인도네시아 정치의 시계를 개발독재와 봉건주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소통과 정책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단숨에 지방도시 시장과 수도 자카르타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궁에 입성한 조코위는 대통령 취임 초기만 해도 국민들의 인기와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지속적인 경제성장, 가시적인 인프라건설, 서민을 향한 복지프로그램 시행으로 조코위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임기 말년까지 고공행진을 했지만 인도네시아 사회는 정부투명성, 사회경제적 평등, 인권, 민주주의 등 질적인 측면에서 과거로 회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투자를 유인한다는 명분 하에 부패척결위원회를 무력화하고 자신의 정적 제거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 의회 정당 사법부에 광범하고 교묘하게 개입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했다.

조코위는 자신의 매제를 헌법재판소장에 임명한 뒤 헌법이 정부통령 출마자격으로 규정한 40세 제한에 예외를 두게 함으로써 36세에 불과하던 장남 기브란 라까부밍 라까에게 부통령후보 자격을 부여하는 무리수까지 두었다.

새로운 정치왕가를 창건하는 데 조코위가 벌인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는 2019년 두번씩이나 자신과 대선에서 경쟁하고 두번 다 선거결과에 불복했던 인도네시아 군부 만행과 인권 침해의 대명사 쁘라보워를 국방부장관으로 영입하고 후임 대통령 후보로 민 것이다. 조코위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지원과 후원을 받은 쁘라보워와 기브란은 정부통령으로 차점자와 33.6%라는 역사상 가장 큰 득표율 차로 당선되었다.

쁘라보워 수비안또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된 뒤 10월 20일 인도네시아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인도네시아 정당정치의 특성인 거대집권연합은 극에 달해 8개의 원내 정당 중 7개의 정당이 참여함으로써, 야당은 민주투쟁당(PDI-P) 단 한개만 남았다. 의회 의석수의 82%를 장악한 것이다. PDI-P조차도 집권연합에 참여하기 위해 협상하는 것을 보면 인도네시아는 야당 없는 정치까지 할 수도 있다.

이 거대한 집권연합을 행정부에 수용하기 위해 22개의 장관직을 늘려 모두 48개로 만들었다. 장관급 53명을 포함 임명직 고위는 100명을 넘었다. 1년 남짓 만에 붕괴했던 수카르노 대통령의 1964년 드위코라내각에 이어 두번째로 큰 정부를 만들었다. 장관들의 출신을 보면 군장성과 경찰 간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동남아 지도자부터 유권자까지 타락

동남아정치는 길게는 지난 10여년 동안, 짧게는 최근 2~3년 동안 비교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이야기한 정치적 쇠퇴를 경험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지도자들은 권위주의화, 스트롱맨화하고 심지어 군인들이 나서는 나라조차 있다. 정치가 폭력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리더십의 덕목에서 도덕성이나 정치윤리가 사라지고 있다. 유권자들도 똑같이 타락해 정치인들의 윤리나 도덕성에 더 이상 괘념치 않는다. 자신들의 이익에 합치하고 동일한 정체성을 드러내면 그만이다.

무엇보다도 정보혁명이 날개를 달아준 정치적 동원과 선동정치가 만연하다.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인도네시아의 쁘라보워 모두 소셜미디어를 통한 정보조작과 사실왜곡의 덕을 크게 보았다. 21세기식 동원과 선동의 특징은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적 회피적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 그냥 한쪽 이야기만 듣는다. 정치적 폭력에서도 물리적인 폭력보다 언어적 폭력의 폐해가 더 심각하다.

1950~1960년대 제3세계 현상에 지나지 않았던 정치적 쇠퇴가 두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 다시 나타나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역사는 진보하지 못하고 반복되는 것일까?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