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외계행성(WASP-127b) 상공의 초음속 제트기류
설연휴 직후 강추위로 전국이 꽁꽁 얼었다. 한파에 동반된 강풍은 체감온도를 영하 20℃로 떨어뜨렸다. 제주 산지에선 초속 28m의 강풍도 불었는데 이는 시속 100km에 달한다. 세계기상기구가 공식 인정한 최고 풍속은 1996년 오스트레일리아 부근의 사이클론에서 측정된 시속 408km란 엄청난 속도다. 이 정도면 대기 상층부를 지나는 제트기류 속도와 맞먹는다.
태양계에서 가장 빠른 바람이 부는 곳은 어디일까? 명왕성이 행성의 지위를 뺏긴 후 가장 먼 행성이 된 해왕성이다. 이곳의 상층부에선 시속 약 1800km의 바람이 분다. 이 정도면 서울 부산을 약 10분이면 주파할 수 있는 속도다. 하지만 이 기록도 외계행성 WASP-127b의 적도 상공에 부는 바람에 비하면 산들바람일 듯싶다. 이 바람의 속도는 무려 시속 3만3000km라 한다. 지구 상공의 제트기류보다 75배나 빠르다.
유럽 중심의 국제연구팀은 최근 칠레의 초거대망원경(VLT, Very Large Telescope)을 이용해 WASP-127b 대기에서 엄청난 속도로 흐르는 제트기류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목성보다 더 크고 훨씬 가벼운 이 기체 행성은 모항성에 근접한 상태에서 모항성 쪽 대기가 112720℃로 달궈진 상태로 4일에 한번 공전하고 있다. 처녀자리 방향으로 520광년이나 떨어진 행성의 대기 속 풍속을 과학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을까?
도플러효과, 520광년 떨어진 행성 풍속 알아
핵심은 도플러 효과다.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는 구급차 소리의 높낮이가 달라지는 경험을 떠올려 보자. 소리 파동은 공기의 밀도가 높고 낮은 지역이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소밀파다. 소리의 피치는 공기밀도가 반복되는 거리인 파장이 결정한다. 파원인 구급차가 내게 다가오면 음파의 파장이 짧아지고 진동수가 증가해 피치가 올라가지만 나를 지나쳐 멀어지면 파장이 길어져 피치는 낮아진다.

전자기 파동인 빛도 같은 현상을 보인다. 가시광선에서 파장은 빛의 색깔을 결정하는데, 빨간색의 파장이 가장 길고 보라색의 파장은 제일 짧다. 빛을 내는 광원이 내게 다가오면 파장이 짧아지는 청색 편이를 보이고 멀어지면 파장이 길어지는 적색 편이를 나타낸다. 정지한 광원의 파장을 기준으로 변화된 파장을 측정하면 광원의 이동 속도를 구할 수 있다.
지구에서 어떤 항성을 관측할 때 목표 별 앞을 외계행성이 지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행성이 별빛을 가려 반사도 하겠지만 별빛의 일부는 행성의 대기를 통과해 지구로 온다. 만약 행성의 대기를 이루는 분자가 별빛의 특정 파장을 흡수한다면 그 흔적이 별빛의 스펙트럼에 새겨진다. 연구진은 WASP-127b가 도는 모항성의 스펙트럼을 정밀 측정해 행성의 대기에 물분자(H2O)와 일산화탄소(CO)가 존재한다는 흔적을 찾아냈다.
모든 분자는 에너지를 받아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진동한다. 가령 CO는 탄소와 산소 사이 결합 길이가 늘어났다 줄어드는 진동을 하는데 그 진동수는 CO만의 고유한 성질로서 사람의 지문처럼 분자 구별의 식별표로 사용된다. CO의 고유 진동수에 부합하는 특정 파장의 적외선을 쬐어주면 이를 흡수해 CO가 진동한다. WASP-127b 대기를 통과한 별빛의 적외선 스펙트럼에서 CO를 진동시키는 특정 파장이 흡수되어 줄어들면 행성의 대기에 CO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연구진은 WASP-127b가 도는 모항성의 적외선 스펙트럼에서 물분자 및 CO의 고유진동에 해당하는 파장들이 흡수되었음을 발견했다. 특이한 점은 흡수 파장이 청색 편이와 적색 편이의 두 성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행성의 바람 중 지구를 향해 움직이는 바람과 지구에서 멀어지는 바람이 있어 도플러효과를 유도했음을 뜻한다.
연구진은 스펙트럼 데이터를 분석해 도플러효과의 원인이 행성의 적도 상공에서 무려 시속 3만3000km로 움직이는 초음속 제트기류라 해석했다. 이 풍속은 현재까지 발견된 5800여개의 외계행성 중 가장 빠른 것이다.
외계생명 신호 찾는 것 시간문제일 수도
외계행성이 모항성 앞을 지날 때 측정되는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분석하면 대기 성분에 더해 대기에서 벌어지는 화학반응도 추정할 수 있다. 바야흐로 외계행성의 발견에 집중하던 연구가 외계행성의 대기화학과 기상학으로 확장되는 중이다.
최근 소행성 베누에서 채취한 시료로부터 DNA를 이루는 성분들이 발견된 것처럼, 우주엔 우리의 예상보다 생명 현상이 더 풍부할지도 모른다. 외계행성의 대기 연구를 통해 조만간 외계생명의 신호를 찾아내는 건 시간 문제라고 보는 과학자도 많다. 그렇게 되면 인류 문명은 외계생명의 발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우주사적 발견의 시대를 살아감에 감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