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기업들 트럼프 황홀감에서 실망감으로?
FT “감세와 탈규제 전망에 낙관론 컸지만 강경한 무역정책에 불만 피력”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관세는 미국 산업을 보호하고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의 소규모 가족기업 ‘톰킨스 프로덕츠(Tompkins Products)’ 같은 일부 미국기업들에겐 재앙과도 같다. 톰킨스는 냉간 압연 알루미늄봉을 수입해 변속기 밸브 등 부품으로 만들어 미국 자동차업체들에 공급하는 기업이다.

최근 트럼프정부가 모든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하면서 톰킨스가 수입하는 주요 원자재 가격이 훨씬 더 비싸질 전망이다. 단기간에 필요한 원자재를 미국 내 공급업체로부터 조달할 수 없다면 이는 큰 부담이 된다. 이 기업 운영책임자인 트레이시 스쿠피엔은 “원자재 가격의 엄청난 상승을 상쇄할 방법은 없다.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다. 트럼프정부는 이달 초 중국에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한 25% 관세도 보류 상태로 대기중이다. 지난주엔 더 많은 나라들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공정하고 호혜적인’ 무역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6일 “트럼프 2기정부의 무역전쟁으로 생산비용이 상승하고 공급망이 교란되고 있다. 이는 미국 전역의 기업들의 수익에 타격을 입힐 전망이다. 소비자들은 동일한 제품에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고 전했다.
포드 최고경영자 짐 팔리는 자동차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치명적일 것으로 예상한다. 팔리 CEO는 지난주 한 컨퍼런스에서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가 부과되면 장기적으로 미국산업계가 한번도 겪지 못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월가의 가장 큰 공화당 기부자 중 한명이자 헤지펀드 시타델의 설립자인 켄 그리핀도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에 대한 트럼프의 무역조치로 불확실성과 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는 결국 경제성장의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트럼프의 관세폭탄 발언이 기업 CEO들과 각국 정책입안자들의 마음을 헤집어놓고 있다. 그들은 무역파트너로서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트럼프정부에 기대감 컸지만
지난해 11월 트럼프의 대선 승리는 월가와 실물경제 모두에 열광의 물결을 일으켰다. 투자자들이 더 강력한 경제성장, 규제완화, 세금인하에 베팅하면서 달러가 급등하고 주가는 사상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무역·이민정책이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서 미국 기업들 상당수가 트럼프정부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기업 경영진들은 트럼프의 수입관세가 기업에 타격을 주고, 서류미비 이민자에 대한 단속이 이미 심각한 인력난을 악화시키며, 급진적인 정부 개편이 연방정부의 원활한 기능을 크게 훼손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예일 경영대학원의 리더십연구 수석부학장인 제프리 소넨펠드는 “지난달 친기업 성향 대통령 취임으로 인한 초기의 행복감은 이제 공포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일각에선 그같은 비판이 지나치다고 지적한다.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 데이비드 솔로몬은 지난주 “시장참여자들은 투자를 촉진할 성장지향적인 트럼프의 정책에 여전히 흥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규제를 줄이려는 트럼프정부의 계획이 은행들에 야성적 충동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세력인 석유업계도 여전한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미국 오일메이저 셰브론의 최고경영자 마이크 워스는 지난달 말 실적 발표에서 “미국의 에너지 풍요를 활용하고 장려하는 행정부를 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며 “트럼프정부는 보다 균형잡힌 접근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골드만삭스 솔로몬 CEO도 이민과 세금, 무역·에너지에 대한 트럼프정부 정책이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는 “많은 정책이 바뀌고 있다. 정책에 대한 확신이 생길 때까지는 약간의 변동성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월가 경영진은 훨씬 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한 고위 투자은행가는 FT에 “트럼프와 그의 최측근이 된 테슬라 일론 머스크의 무질서한 행동과 예측불가능성은 많은 경영진들이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며 “돌이켜보면 우리는 행정부가 어떤 모습일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평화와 번영이라는 목표를 해치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야성적 충동도 아직 잠잠하다. 트럼프의 호전적인 무역정책으로 미국 인수합병은 10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금융정보기업 LSEG에 따르면 올 1월 미국의 인수합병 건수는 873건으로, 전년 동월 대비 약 30% 하락했다. 2015년 이후 최저다.
한편 전미자영업연맹의 불확실성지수는 14포인트 상승한 100으로 역대 3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미시간대학교의 1월 소비자심리지수도 약 5% 하락해 지난해 7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미시간대는 “설문조사 결과 관세정책의 부정적 영향을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소비자들의 인식으로 내구재 구매 의향이 12% 하락했다”고 지적했다.
점차 고조되는 부정적 시각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트럼프가 선거기간 관세를 언급한 것은 무역에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협상전략으로 여겼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는 희망사항으로 드러났다.
예일 경영대 소넨펠드 부학장은 “관세공격이 주로 적대국이 아닌 동맹국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기업 CEO들은 정말 걱정하고 있다”며 “트럼프는 경제성장을 내세워 당선됐는데, 기업가들은 이제 미국경제가 위험에 처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가들의 딜레마는 침묵으로 고통을 감내할 것인지, 아니면 목소리를 내 백악관의 반감을 살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다.
포드의 팔리 CEO는 미국산업을 부양하기 위한 관세가 실제로는 타국 경쟁사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솔직히 한국과 일본, 유럽 자동차제조사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며 “그들은 멕시코·캐나다 관세가 적용되지 않는 150만~200만대의 차량을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기업에게는 사상 최대 횡재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톰킨스 프로덕츠의 운영책임자 스쿠피엔도 팔리의 견해에 동조한다. 톰킨스는 알루미늄을 무관세로 조달해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한국·스페인 기업들과 경쟁한다. 스쿠피엔은 “같은 금속이 미국으로 들어오고 있지만 완제품이기 때문에 그들에겐 관세가 없다. 우리는 경쟁력을 잃었다”며 “미국에도 알루미늄 공급업체가 있지만 공급처 전환엔 긴 리드타임(주문에서 생산, 배송에 이르는 총시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업계 전반에서 톰킨스와 같은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금속제조업체·사용업체연합은 최근 “실행가능한 면제절차 없이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하게 되면 미국 제조업체를 곧바로 위험에 빠뜨린다”고 비판했다.
미국기업들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건 관세뿐만이 아니다. 트럼프정부가 전기차 세금감면과 충전네트워크 구축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하면서 전기차업계도 동요하고 있다. 샌디에이고에 본사를 둔 전기차충전기업 ‘빔 글로벌’의 CEO 데스몬드 휘틀리는 FT에 “전기차와 재생에너지를 겨냥한 행정명령이 쏟아지면서 이 분야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급감했다”고 말했다.
공화당 의원들이 트럼프의 우선순위 정책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예산을 짜면서, 바이든정부가 청정산업에 4000억달러 이상을 투입해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위태로워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 주 해상풍력 승인 및 기존 풍력임대 검토에 대한 유예를 명령했고, 친환경에너지에 대한 수천억달러 대출·보조금을 일시중지했다.
버지니아해안에 미국 최대규모로 건설중인 ‘도미니언 에너지’ 해상풍력 프로젝트도 불안하다. 도미니언 최고경영자 로버트 블루는 지난주 실적발표에서 “프로젝트를 중단하면 전기요금 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상승할 것”이라며 “풍력터빈은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게 된다. 이는 인공지능(AI) 등 최첨단 기술분야에서 미국의 우위를 지속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도미니언 프로젝트는 미국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톰킨스의 스쿠피엔은 “산업생산시설을 미국으로 되돌리기 위해 고안된 트럼프정부 정책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결국 우리 같은 미국 제조업체들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한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