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통치기구 위치와 배치가 갖는 의미
비상계엄 같은 권력작용은 대통령실 및 국회와 같은 통치기구의 위치와 배치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헌법은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국무회의를 거쳐야 하고, 선포사실을 국회에 지체없이 통고해야 하며,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의 요구가 있으면 국무회의를 거쳐 해제하게 하고 있다.
국가중대사 결정을 위해 국가지도자들이 신속히 모일 수 있도록 주요 기관들이 가까이 있어야 함을 전제한다. 더 나아가 헌법적 의미를 살려 이들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워싱턴 D.C., 통치기구 간의 견제와 균형을 감안한 도시설계
워싱턴 D.C.에는 연방 통치기구들이 가까이 모여 있다. 이들의 배치설계가 눈에 띈다. 국민을 대표하는 연방의회 의사당은 그 위상을 존중해 주변보다 높은 곳에 배치했고, 동서남북으로 향하는 길(street)의 중심에 위치한다. 대법원은 의원들의 출입과 행동을 감시하듯 의사당의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다. 의사당과 백악관은 떨어져 있지만 헌법이 출범한 펜실베이니아주의 이름을 따다 붙인 가로(avenue)로 연결되어 있다.
주요 통치기구 인근에 자리한 기념관들 또한 인상적이다. 노예해방을 선언했던 링컨 기념관은 의사당을 정면에서 주시하고 있고, 연방정부의 권한강화를 경계했던 제퍼슨 기념관은 먼발치에서 백악관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미국처럼 신도시 형태로 수도를 완성하지 못했다. 서울은 조선 왕조, 일제 식민지, 미 군정을 거쳐 민주공화국인 지금도 나라의 중심적 통치공간이다. 숨가쁘게 달려온 근현대사에는 통치기구의 위치와 배치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과밀한 서울에 헌법적 가치를 도시설계에 투영할 규모있는 공간 찾기도 어려웠다. 각 기관들은 건축물 간 연계성보다는 늘어나는 업무 수요를 수용하고 권위를 세울 공간을 찾는 데 바빴다.
그러다가 노무현정부의 국가 균형발전정책에 힘입어 충청권 행정수도 건설이 추진됐다. 2004년 시행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진 수도를 건설하고자 주요 통치기구의 신행정수도로의 이전의 길을 열어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행정기능 중심의 도시건설을 전제로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정부부처가 세종시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주요 통치기구는 서울에 남아 있다.
국회와 정부의 이격으로 인한 부작용은 크다. 국회 입법권은 날로 강화되고 있어 세종 소재 공무원들은 서류 등짐을 지고 매일같이 서울로 오간다. 국가 중대사에 대한 의사결정에 신속히 참여해야 할 대통령 국회의원 국무위원들이 흩어져 있음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위험요소도 잠재해 있다.
해답은 뻔하다. 통치기구들을 한곳에 모아야 한다. 2023년에 국회 일부 상임위원회와 소속기관을 세종시에 이전하도록 국회규칙 개정이 이루어져서 국회이전의 첫 단추가 꿰어졌다. 대통령 제2집무실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탄핵정국에 맞물려 헌법 개정 논의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으니 차제에 국민적 합의를 거쳐 헌법에 수도의 위상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 좋겠다.
수도 위상과 통치기구 배치까지 고민하는 담론형성의 기회
통치기구는 국민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도록 접근성을 개선해야 하며 건축물의 배치 역시 중요한 요소로 고려해야 한다. 때마침 정부가 세종시에 주요 통치기구가 위치할 핵심구역에 대한 설계공모를 한다 하니 헌법적 가치를 잘 담아내는 안이 마련되길 바란다. 통치기구의 권력남용을 제어하고 민주주의 실현에 도움이 되도록 공간에도 질서와 가치를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
이번 비상계엄과 그 수습과정이 통치권한의 견제와 균형을 재정립하는 것은 물론, 수도의 위상과 통치기구의 배치까지 고민하는 담론형성 기회로 이어지면 좋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 기틀이 더욱 다져지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