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반도체 만드는데 EUV가 왜 필요할까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정보통신 산업의 기초가 되는 반도체 기술은 미국과 중국, 우리나라와 대만 등 관련 국가의 명운을 가를 정도로 중요한 기술이 되었다.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 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EUV 노광 장비다. 이제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 장비는 네델란드의 ASML이라는 기업이 독점 생산 공급한다. 차세대 반도체의 극미세패턴 제작에 필수적이며 중국과 반도체 산업 패권 경쟁을 하고 있는 미국이 이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다는 사실도 꽤 알려져있다.
도대체 EUV 장비가 뭐길래 ASML은 이 장비를 독점하는 것이며 마치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처럼 경쟁국에 수출을 금지할까? 그리고 다양한 첨단기술에서 미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중국은 이 장비를 왜 스스로 개발하지 못하는 것일까?
EUV는 극자외선(extreme ultraviolet)의 약자로 반도체 산업에서는 파장이 13.5nm 인 빛을 말한다. 여기서 1nm는 10억분의 1m를 의미한다. ASML의 EUV 노광 장비는 EUV 빛을 사용해서 반도체 기판위에 미세패턴을 형성해 손톱 크기의 반도체칩에 수십억개의 트랜지스터를 새겨 넣는 장비다. 이런 미세패턴은 현미경으로 작은 물체를 확대해서 보는 것과 유사하게 물체의 아주 작은 광학 이미지를 만들어서 형성한다.
대학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장비 현실화
광학 현미경은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도 원자를 볼 수는 없다. 물체를 보는데 사용한 빛의 파장보다 훨씬 작은 것은 원리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시광선을 사용하는 광학 현미경은 대략 400nm 보다 작은 물체는 못본다. 반도체 미세구조 역시 이미지 형성에 사용한 빛의 파장보다 훨씬 짧은 선폭을 만들기는 매우 힘들다.
물론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엔지니어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 193nm의 빛으로 7nm 선폭을 가지는 미세패턴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 관련 뉴스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중국의 모 기업이 미국의 EUV 장비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7nm 선폭의 반도체를 제작해 스마트폰에 사용했다는 기사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비용 효율 시간, 그리고 반도체칩의 수율 측면에서 매우 불리하다. 처음부터 파장이 14배 이상 짧은 EUV 빛을 사용하면 수천억원에 달하는 장비 가격에도 불구하고 모든 면에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선폭이 작아질수록 가격대 성능비가 향상되는 반도체의 특성상 현재의 5nm 선단 공정이나 조만간 양산될 3nm 공정에서는 EUV 장비를 사용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가지기 힘들다.

EUV 장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13.5nm 빛을 생성하는 광원이다. 빛을 만드는 물리적 원리 중 하나는 전기를 띤 입자가 가속운동을 하는 것이다. 백열등처럼 고온의 물체는 내부의 전자들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가속운동을 하기 때문에 빛을 내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LED 전구나 형광등 내부의 가스들처럼 물질 안의 전자들이 에너지 상태를 바꾸면서 그 차이를 빛으로 방출하는 것이다.
ASML EUV 장비에서는 강력한 레이저와 금속의 상호작용을 이용한다. 주석은 230℃ 정도에서 녹아서 액체가 되는데, 액체 주석을 직경 약 0.025mm 크기의 작은 방울로 만들어 초속 70m로 쏜 후 강력한 레이저 펄스를 쬐면 액체 주석 방울에서 플라스마가 발생하면서 EUV 빛이 나온다.
필자가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의 실험실 같은 곳에서나 해 볼 고난이도 실험을 극도의 신뢰성을 유지하면서 24시간 가동하는 반도체 제조장비에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180nm보다 짧은 파장의 빛은 공기에 흡수되므로 모든 과정은 진공 안에서 이루어진다. 게다가 EUV 빛은 투과하는 렌즈가 없기 때문에 반사거울을 쓰는데 한번 반사할 때마다 광량이 상당히 떨어진다. 이에 더해서 나노미터 수준의 정밀도를 가진 기계 구동장치들이 필수적으로 함께 집적되어야 전체 장비가 만들어진다.
긴 호흡의 첨단기술 개발이 초격차 만든 사례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ASML은 지난 30년 가까이 기술개발에 매진하며 다양한 협력 관계를 지속한 결과 오늘날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EUV 장비를 공급하는 ‘수퍼 을’의 위치를 확보했다. 국가적으로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어 무인 달착륙에도 성공한 중국이지만 EUV 장비를 자체개발 하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긴 호흡의 첨단기술 개발이 확고한 초격차를 만들어낸 대표적 사례가 ASML과 EUV 장비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