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상속세법 ‘톱다운식 해법’ 난항
큰 틀 합의해도 세부 쟁점 논란 지속, 상임위서 난제 많아
거대양당 지도부 의사결정, 상임위 중심주의 훼손 논란
상임위 논의를 배제하고 거대양당 지도부간 주고받는 톱다운 방식으로 진행된 연금개혁과 상속세법 개정이 난항을 겪고 있다. 상임위의 숙의 과정을 사실상 생략한 채 이뤄진 것으로 정부와 여당의 엇박자가 나왔고 추가 제안이 제기되면서 진통을 겪고 있다.
17일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은 “박주민 복지위원장으로부터 여야 합의에 근거해 복지위가 이번 주 정도에 (연금개혁) 모수개혁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18일 복지위는 전체회의를 열고 국민연금 개혁관련 내용을 논의할 예정이다.
거대양당 지도부가 만나 해법을 찾는 톱다운 방식의 국정협의회는 합의점에 근접한 모수개혁을 먼저 처리하고 구조개혁은 연금특위를 통해 추가 논의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고는 모수개혁 중 이견으로 남아있던 소득대체율에 대해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지난 14일 국민의힘이 주장해온 ‘43%’를 수용했고 이를 국민의힘이 ‘환영’ 메시지를 내면서 물꼬가 트였다.
‘43% 합의’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 결단으로 이뤄졌다. 13일 본회의 이후 이 대표가 최고위원회에 ‘43% 검토’를 지시했다고 한다. 민주당은 그동안 1%p를 더 내리면 노후보장에 치명적 결함이 생긴다며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국민연금 지급보장 의무 명문화 △저소득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 확대 △첫째 아이까지 출산크레딧 확대 및 군 복무 기간 전체로 크레딧 적용 확대 등 3가지를 전제조건으로 걸었다.
같은 날 권성동 원내대표는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3%를 (여당이) 받되, 자동조정장치, 다른 연금과의 연계 등에 대해선 연금특위를 발족해 논의하겠다고 우리가 제안했고, 민주당이 그걸 받아 어느 정도 합의가 된 상태”라고 했다.
하지만 ‘악마의 디테일’에 걸렸다. ‘여야 합의 처리’ 문구 탓에 연금특위 구성에 실패했다. 연금특위 위원장을 국민의힘 소속 의원이 맡기로 함에 따라 ‘여야 합의 처리’를 명문화하면 연금특위 운영 자체가 국민의힘 주도로 흐를 수 있다는 게 민주당의 우려다. 여당은 ‘합의처리’를 관철하지 않으면 민주당의 독주를 막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은 “연금특위에 합의해야 모수개혁도 가능하다”는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다시 안갯속으로 들어간 상황이다.
상속세법도 톱다운식의 논의로 합의점을 찾았다가 장애물에 걸렸다. 민주당이 ‘공제한도를 10억원에서 18억원으로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실상 국민의힘의 ‘10억원에서 20억원으로 늘리는 방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제안이었다. 다만 국민의힘이 내놓았던 ‘최고세율 인하’는 추후 논의과제로 돌려놨다.
국민의힘이 ‘최고세율 인하’를 마지노선으로 잡고 ‘불가입장’을 고수하자 민주당은 이번엔 ‘배우자 상속세 폐지’를 내걸었고 국민의힘이 결국 수용했다.
하지만 ‘세부사항’이 난제다. 상속규모가 5억원을 넘을 경우 배우자의 법정상속분 한도에서 30억원까지 공제할 것인지, 아예 모든 상속세 자체를 없앨 것인지가 논란이다. 또 정부가 상속세 제도 자체를 완전히 뒤엎는 ‘유산취득세’를 제안하면서 거대양당의 합의과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정부는 오는 19일 유산취득세 개편안을 입법예고하고 다음 달 공청회 등을 거쳐 5월 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방침이다. 민주당은 유산취득세가 부자감세라고 공격하고 있다.
거대양당은 그러면서 상임위나 소위 개최를 서로 거부하고 있다며 비난하면서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지도부간 의견이 조율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상임위에서 세부 내용을 논의하면 많은 부분에서 부딪힐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모양새다.
상속세 공제한도 확대와 소득대체율 하향에 합의한 것을 두고 시민단체와 소수정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조국혁신당 김선민 당대표 권한대행은 “이제 내란 정당 국민의힘이 주장하는 소득대체율 43%를 수용하는 것이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진의인지 묻고 싶다”며 “선거 때만 되면 노후소득 보장을 공약하며 표를 달라고 할 것인가. 이는 신뢰와 염치의 문제”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상임위 중심주의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 입법부가 대화와 타협이 부재한 ‘무정치 시대’를 맞아 톱다운식 의사결정에 주력하면 상임위의 의견 조율능력은 무력화되고 여야 지도부간 ‘핑퐁 논쟁’만 가열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상임위가 쟁점을 해소하고 합의점을 찾는 기능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입법부 의사결정과정이 왜곡돼 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모 국회 관계자는 “우리나라 국회는 상임위 중심주의로 전문영역인 상임위에서 어떻게든 논의하고 해법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