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장비, ASML 독주 속 일본 중국 추격
ASML 최첨단 EUV장비에 일본 캐논, NIL로 맞서 … 중국도 자체개발 노력
ASML의 최신 칩제조장비는 컨테이너 2개 크기에 무게 150톤에 달하는 거대한 기계로 가격은 약 3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에 달한다. 현재 판매중인 반도체 제조장비 중 가장 진보했다.

ASML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성으로 글로벌 기술전쟁의 중심에 섰다. 중국이 최첨단 AI 칩을 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ASML이 중국 칩제조업체들에 최첨단 장비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중국은 이에 대응해 수십억달러를 투입해 자체 개발에 나섰다. 한편 일본 캐논은 더 간단하고 저렴한 기술에 베팅하며 ASML의 지배력을 허물려 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여러달 만에 업계 리더십이 바뀌는 소프트웨어와 달리 리소그래피(실리폰웨이퍼 등 기판에 극미세 설계도를 그리는 일) 장비 부분에서의 성공은 수십년이 걸리는 느린 경쟁”이라며 “ASML을 추월하는 건 쉽지 않을 전망이지만, 컴퓨팅과 AI, 어쩌면 기술 자체의 미래를 좌우할 칩 제조장비를 놓고 첨예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ASML의 최신 리소그래피 장비는 놀랍다. 이 장비는 진공챔버에 용융주석(molten tin) 5만방울을 발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각 방울은 두 차례 쏘아지는 레이저를 통해 기화된다. 이 과정에서 각 주석 방울은 태양 표면보다 약 40배 더 뜨거운 22만℃에 달하는 뜨거운 플라즈마로 변해 극자외선(EUV)의 빛을 방출한다.
이 빛은 여러개의 거울에 반사된다. 이 거울은 완벽에 가까운 매끈함을 자랑한다. 굴곡을 찾으려면 1조분의 1m 수준으로 정밀측정해야 한다. 거울은 칩회로 청사진이 포함된 마스크 또는 형판(템플릿)에 빛을 집중시킨다. 마지막으로 광선은 빛에 민감한 화학물질로 코팅된 실리콘웨이퍼에 반사돼 의도한 디자인을 칩에 새긴다.
기술·시장 지배력 굳건한 ASML
ASML 장비는 칩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다.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 미국 인텔은 최첨단 프로세서를 생산하기 위해 이 장비를 사용한다. 7나노미터(nm·10억분의 1m)보다 작은 칩을 안정적으로 인쇄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드는 곳은 ASML말고는 없다. 14nm보다 큰 범용 반도체를 만드는 장비 부문에서도 ASML 점유율은 90%를 넘는다.
최첨단 프로세서는 표준 우표 크기의 1.5배 정도 되는 실리콘 조각에 1000억개 이상의 트랜지스터와 70개 이상의 레이어, 100㎞ 이상의 배선을 담을 수 있다. 리소그래피 장비는 웨이퍼에 트랜지스터와 금속 와이어 패턴을 한층씩 식각(에칭)해 단계적으로 프로세서를 만든다.
ASML 장비는 복잡하고도 정교하지만 기본원리는 스텐실을 통과한 빛이 표면에 이미지를 투사하는 슬라이드 프로젝터와 매우 유사하다. 리소그래피 장비가 얼마나 미세하게 설계도를 인쇄할 수 있느냐는 2가지 요소에 달렸다. 첫번째는 빛의 파장이다. 미세한 붓을 사용하면 더 세밀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것처럼 파장이 짧을수록 더 작은 패턴을 만들 수 있다. ASML 구형장비는 248nm에서 193nm 사이의 파장을 가진 심자외선(DUV) 광을 사용해 38nm를 인쇄했다.
ASML은 이를 더 줄이기 위해 파장이 13.5nm인 EUV 광선으로 전환했다. EUV는 우주에서 태양 코로나에 의해 자연적으로 방출되지만 지구에서 생성하는 건 훨씬 더 까다롭다. 또 EUV 빛은 공기나 유리 및 대부분의 일반물질에 완전히 흡수되기 때문에 진공상태에서 특수거울을 사용해 빛을 반사하고 유도하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공정을 완성하기 위해 ASML은 20년을 투자했다.
미세설계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은 특수거울의 개구수(NA)를 조정하는 것이다. 개구수는 광학에서 빛을 받아들이거나 내보내는 입사각의 특징을 지닌 무차원 수를 말한다. 거울이 얼마나 많은 빛을 수집해 피사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ASML의 최신장비 ‘하이 뉴매리컬애퍼처(NA) EUV’는 기존 0.33인 NA를 0.55로 키워 8nm 칩에 설계도를 인쇄할 수 있다. 이 회사는 더 작은 칩을 만들기 위해 기존 EUV 광원을 사용하면서도 NA를 0.75 이상으로 키운 ‘하이퍼 NA’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NA가 클수록 거울이 더 넓은 범위의 각도에서 들어오는 빛을 모아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정밀도가 향상된다.
하지만 대가가 따른다. NA가 커지면 확장된 빛의 경로를 차단하고 방향을 지정하기 위해 더 큰 거울이 필요하다. ASML이 NA를 0.33에서 0.55로 늘렸을 때 거울의 크기는 2배로 커지고 무게는 10배나 무거워져 현재 수백㎏에 달한다. 여기서 다시 NA를 키우면 무게는 물론 전력소비 우려도 커진다. 또 다른 걸림돌은 가격이다. ASML의 하이 NA장비는 이전 것보다 약 2배 비싸다. 하이퍼-NA 장비가 개발된다면 그보다 훨씬 고가일 것으로 예상된다.
저렴하고 간단한 방식 개발 나선 캐논
ASML이 리소그래피 장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안, 최첨단 칩제조 장비와 단절된 중국은 아직 수입가능한 28nm 이상의 구형 ASML 장비에서 더 많은 칩을 생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국이 쓰는 방식은 패턴을 여러 노광과 식각단계로 분할하는 ‘멀티 패터닝’이다. 멀티 패터닝은 효과적이지만 복잡성이 증가하고 생산속도가 느려진다는 단점이 있다.
중국은 자체 리소그래피 장비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국영기업인 상하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MEE)는 DUV 광원을 사용해 28nm 칩을 생산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EUV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리서치회사 세미애널리시스의 제프 코흐는 “중국이 EUV 장비를 개발한다고 해도 5000개 이상의 전문 공급업체들로 확장된 ASML의 방대한 공급망을 복제해야 하는 난제에 부딪힐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첨단 리소그래피 장비에서 ASML의 지배력이 굳건한 가운데 한때 업계 선두주자였던 일본 캐논은 ‘나노임프린트 리소그래피(NIL)’라는 대안 개발에 베팅하고 있다. 인쇄기처럼 웨이퍼에 직접 회로패턴을 찍어내는 방식이다. 이론적으로 NIL은 나노미터 단위의 정확도로 인쇄할 수 있어 ASML EUV 장비에 맞선 저비용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NIL 공정은 전자 빔으로 회로 템플릿이 식각된 마스터 마스크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된다. 액체수지 방울을 웨이퍼에 도포한 뒤 마스크로 웨이퍼에 회로패턴을 누른다. 그런 다음 자외선을 사용해 수지를 굳히고 회로패턴을 형성한 후 마스크를 제거한다. 이 단계는 칩의 모든 레이어에서 반복된다. 캐논은 이 방식에 투입되는 비용이 ASML의 동급장비보다 약 40% 저렴할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NIL이 주류기술이 되려면 여러가지 과제를 극복해야 한다. 먼저 금형의 작은 입자나 결함이 전체 웨이퍼에 반복적으로 결함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정렬도 또 다른 장애물이다. 칩은 레이어를 쌓아 제작되기 때문에 모든 층의 회로패턴이 정확하게 정렬돼야 한다. 웨이퍼 평탄도의 변화나 금형과 웨이퍼 사이 약간의 정렬 불량은 나노 규모의 오류를 유발해 전기연결을 방해할 수 있다. 캐논은 나노미터 단위의 정밀도를 달성했다고 주장하지만 생산과정에서 이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NIL 장비가 시간당 얼마나 많은 웨이퍼를 처리할 수 있는지도 문제다. ASML의 하이 NA 장비는 시간당 180개 넘는 웨이퍼를 처리할 수 있다. 구형모델은 그보다 2배 많은 양을 다룬다. 반면 캐논의 최신 NIL 시스템은 시간당 110개의 웨이퍼를 처리할 수 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칩 양산에 적합하지 않은 수준이다.
NIL 방식은 반도체 제조 이외의 분야, 특히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와 기타 고정밀 부품 제조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제 이 기술은 메모리칩 생산과정으로 확대되고 있다. 로직칩보다 높은 결함률이 허용되는 부문이기 때문이다. 캐논 광학사업부 책임자인 카즈노리 이와모토는 “NIL 방식이 칩 제조단계를 보다 저렴하게 만들면서 EUV 리소그래피와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같은 혁신은 반도체 기업들이 차세대 AI 모델을 구동할 수 있는 빠르고 에너지 효율적인 칩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ASML이 조심하지 않으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를 만드는 기업’이라는 타이틀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