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건 선진국으로 가는 길

인간의 본능적 실수를 사고원인으로 삼는 어리석음

2025-03-28 12:59:58 게재

스위스 치즈모델 등 안전분야에 많은 연구 업적을 남기고 2월 5일 작고한 제임스 리즌(James Reason)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는 사고에서 지목되는 근로자의 불안전 행동(Human Error, 실수)은 사고원인이 아닌 결과라고 했다.

얼마 전 덤프트럭에 실린 석탄을 하역하는 과정에 적재함에서 쏟아진 석탄에 인근 작업자가 깔려 사망한 중대재해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이 있었다.

사고 당시 트럭에는 적재정량을 50% 초과한 석탄이 실려 있었고 적재함 뒷문은 닫혀 있었다. 하역을 위해 적재함을 올리는 과정에서 적재함을 밀어 올리는 유압 실린더가 꺾이면서 적재함이 전도돼 석탄 투입구 후방에 있던 다른 작업자가 쏟아진 석탄에 깔려 사망했다.

재판부는 “사고는 덤프트럭 운전자가 적재함 뒷문을 열지 않은 채 적재함을 들어 올린 오조작의 과실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판시하고 운전자에게 집행을 유예한 징역형을 선고했다.

운전자가 적재함을 열지 않은 것은 고의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차에 와서야 열쇠를 두고 나온 것을 알게 되는 경우처럼 깜박 잊은 것이다. 처벌의 취지는 이해되지만 경각심이 미래의 유사 사고방지에 무용하다면 그 처벌은 타당하다 할 수 없다.

근로자 실수, 작업 조건과 환경의 결과

1979년 미국의 TMI원전 노심 붕괴사고를 계기로 사람의 불안전 행동(Human Error)에 대한 많은 연구가 수행됐다. 원자로 내부의 증기 발생장치 고장에 따라 자동 작동된 비상급수 장치를 관제실 근무자가 정지시켰다. 그 조작으로 원자로 내부 장치들의 이상은 급속도로 확대돼 통제불능 상태에 진입했고 결국 노심이 붕괴됐다.

이에 대한 교육은 받았지만 오랜 근무기간 중 해당 장치의 작동을 경험하지 못한 근무자는 비상급수 장치의 작동을 비정상으로 인식하고 정지시켰다. 그들은 오조작으로 볼 수 있는 근무자의 행위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불안전 행동을 연구해 많은 성과를 거뒀다.

인지공학자들은 사람들의 깜박 잊음(Lapse)과 미끄러짐(slips)과 같은 인간의 본능적 한계에 기인한 현상은 교육·훈련으로 제거할 수 없다고 본다. 인지공학자들은 설비 신호 등 작업 조건과 환경적 방법을 찾아 필요한 조치를 하는 기업의 시스템적 접근, 이를 유인하기 위한 법규와 정부 규제방식 개선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안전선진국 대비 큰 사고사망률 격차가 이런 합리성 차이에서 유발되는 것이다.

직무 교육과 훈련을 통해 정상작업 동작이 습관되더라도 사람의 본성적 한계로 인한 착각, 착오, 자세 불안정과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생산현장 특성에 적합한 작업 조건과 환경에서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업 경영은 그에 필요한 재정과 인력을, 정부는 법규와 정책으로 그것을 유인해야 한다.

사장되고 있는 작업 조건·환경 설계 정보

발생한 사고는 작업 조건과 환경 개선, 그를 위한 경영 차원의 조치, 법과 정책 수립에 반영해야 하는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리고 대안의 정합성은 정보의 양에 비례한다. 그 귀한 정보가 담긴 연간 10만여건의 ‘재해발생보고서’가 방치 수준으로 관리되고 있다.

사고에 따른 손실의 우연성을 고려하면 비록 사망재해가 아니더라도 같은 수준의 귀한 정보들이 담긴 자료다. 이와 같은 중요 정보가 전문적인 분석은 고사하고 자료내용의 사실성과 적정성은 물론, 확보조차 소홀히 관리되고 있다.

사고분석은 전문 영역이어서 행정 여건 상 정부에서 직접 수행하기 여의치 않을 수 있다. 고용노동부 산하 전문기관인 안전보건공단(공단)에 알아보니 재해발생보고서는 정부가 감독 영역으로 자체 관리하고 있어서 공단이 맡고 있지 않다고 한다.

집계 수준의 통계가 아니라 전문적인 분석을 통해 개별 현장의 안전 확보에서 법과 정책에 이르기까지 전체 산업안전 분야의 업무에 반드시 반영돼야 하는 필수 정보가 담긴 자료다. 정부 정책 수립과 그 성과의 판단에도 중요한 자료다. 현재의 방치 배경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반드시 진상을 밝혀 업무방해 책임을 엄히 물어야 할 일이다.

작업자의 실수는 현장 작업 조건과 환경에서 비롯되고, 그 조건과 환경은 기업의 경영적 조치에 좌우되며, 이 전체에 법과 정책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작고한 석학이 Blunt End(도끼등)개념으로 설명한 사고발생 구조다. 인간 본능적 한계에 따른 실수를 사고원인으로 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우리에게 남긴 통찰이다.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