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두뇌유출 조짐, 각국 인재확보 잰걸음
트럼프정부, 과학계 지원 줄이고 이념잣대로 비난 … 유럽·중국·캐나다 “인재 잡아라” 적극 나서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교육·학술기관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미국이 21세기 글로벌 초강대국 지위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고등교육기관들은 전세계 학생과 교사, 연구원을 끌어들이면서 학문적 우수성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미국 과학연구정책과 자금지원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또 트럼프정부가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을 이념의 십자선에 올려놓으면서 과학인재의 대량이탈이 촉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7일(현지시간) 영국 과학전문지 ‘네이처’가 발표한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 연구원들 중 75%(1600명의 응답자 중 12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유럽이나 캐나다 등으로 떠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연구경력 시작단계에 있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690명의 대학원 연구자 중 548명, 박사과정 학생 340명 중 255명이 타국으로의 이전을 고려하고 있었다.
지난해 3월 발표된 미국국립과학재단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외국 태생 연구자들은 미국 전체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종사자의 19%, 박사급 과학자·공학자의 43%를 차지한다.
미국 주간지 ‘더 위크’는 29일(현지시각) “학생과 연구직 구직자들이 연구자금 삭감, 본국으로의 추방 등 나쁜 상황에 직면했다. 미국의 교육적 매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며 “다른 국가들이 이러한 변화를 주목하고 있으며 이를 활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100년에 1번 오는 인재 확보 기회’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이달 17일 “트럼프정부의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전세계 대학들이 미국에 기반을 둔 연구자들의 지원이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많은 연구기관들이 최근 수십년 미국으로 꾸준히 유입된 과학자들을 다시 되찾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이언스에 따르면 프랑스는 가장 빨리 나선 나라 중 하나다. 엑스마르세유대 총장 에릭 베르통은 이달 초 “미국에서 새로운 두뇌유출이 일어나고 있다”며 ‘과학을 위한 안전한 공간’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미국 학자들이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젝트다. 약 15명의 연구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1000만~1500만유로를 투자한다. 이 대학 대변인에 따르면 50명 이상의 미국 학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또 다른 프랑스 대학 파리싸클레는 미국 연구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기존 계획을 연장할 계획이다.
27일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에 따르면 독일 대표적인 연구기관 막스플랑크협회 회장 패트릭 크라머는 “최근 미국 연구자들의 지원이 최소 2배, 많게는 3배 증가했다”며 “특히 인도와 한국 중국 출신의 박사후과정 학생들이 독일을 미국에 대한 괜찮은 대안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헬름홀츠협회 회장 오트마 비스틀러는 “연구의 중심지인 독일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현재 상황과 관계없이 미국에 대한 매력적 대안”이라며 “국제적인 연구자들이 독일에서 경력을 쌓는 것을 점점 더 고려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현재 미국에서 근무하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대안을 찾고 있는 전세계의 재능 있는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헬름홀츠협회는 4만6000명 넘는 직원과 약 63억유로의 연간예산을 보유한 독일 최대 연구진흥기관이다.
스위스 로잔대 종양학자로 유럽암연구협회 차기회장으로 뽑인 요한나 조이스는 “미국에 기반을 둔 과학자들이 내 연구실에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사례가 올해 1월 이후 5배 증가했다”며 “미국의 많은 과학자들에게 미래가 매우 불확실해졌다는 점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대는 올해 미국 과학자들의 지원이 급증했다고 밝혔다. 이 대학 대변인은 사이언스에 “주로 유럽 출신 연구자들이 미국을 떠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다 직접적으로 나선 대학도 있다. 트럼프정부가 컬럼비아대학에 대한 4억달러의 연방기금 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고 밝힌 뒤, 베이징대 신경생물학자이자 캐피털의과대 전 총장인 라우이는 컬럼비아대 연구자들에 보낸 이메일에서 “보조금과 임용계약이 대폭 취소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만약 과학연구를 수행할 안정적인 자리를 원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나에게 연락해달라”고 썼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30일 “최근 수년 동안 미국에 기반을 둔 과학자들의 유입이 현저하게 증가한 국가 중 하나는 중국”이라며 “최근 미국의 잠재적 인재 유출 흐름은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가속화해 중국이 특정 과학분야에서 선두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미국을 뒤쫓는 분야에서 발전을 앞당길 특별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했다.
호주전략정책연구소 수석분석가 대니얼 케이브는 “미국 학계 의 격변은 호주에게도 100년에 1번 찾아오는 인재확보 기회다. 이 상황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대단한 기회를 낭비하는 것”이라며 호주정부에 “미국 최고의 과학자들에게 패스트트랙 비자를 발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캐나다 ‘더 힐타임스’는 “캐나다 대학들은 미국 학계를 탈출하는 인재들의 진입경로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육사 교수인 조너선 짐머만은 캐나다 방송 CBC 인터뷰에서 “역사적으로 전세계 각국의 인재가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미국에 엄청난 이익이 됐다”며 “하지만 트럼프정부 정책의 결과로 반대 상황이 진행될 것이라는 진짜 위험이 생겼다”고 말했다.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도 피해
워싱턴대 생물학 교수 칼 버그스트롬은 보건·생의학 전문지 ‘스타트(STAT)’에 “현재 미국 학계에 인재들에 대한 폭탄세일이 있다”고 말했다. STAT는 “트럼프정부의 움직임에 대한 불안이 너무 깊어 궁극적으로 바이오의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전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지난 24일 “미 컬럼비아대 박사과정학생인 마흐무드 칼릴 등 합법적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학생들을 법적으로 의심스러운 이유를 들어 구금하는 사례는 이미 미국기관에서 공부하는 외국태생 학자뿐 아니라 향후 미국에서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도 미국을 단념하게 만드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25일 “학계 구성원들의 우려는 개별 국내고용 전망에 국한되지 않고 해당 연구의 장기적 생존 가능성 자체를 포함한다”고 전했다.
미국 최대 생의학 연구지원기관인 국립보건원(NIH) 간부를 지내다 최근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 소장으로 옮긴 알제리 태생 야스민 벨카이드는 NYT에 “과학계와 과학자 세대 전체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교육부장관 필립 바티스트도 NYT에 “트럼프정부의 움직임은 미국뿐 아니라 국제 파트너십으로 연결된 전세계 연구 전영역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비판했다.
트럼프정부는 지난달 NIH 예산 수십억달러를 삭감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미국법원은 ‘일자리 손실과 중요한 임상시험의 중단 등 NIH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며 예산삭감 조치 효력을 금지했다. 2023년 발표된 벤틀리대 연구진 논문에 따르면 미국식품의약국(FDA)이 2000~2019년 승인한 387개의 약물 중 1개를 제외한 모든 약물 개발이 NIH가 자금을 지원한 연구 덕분에 가능했다.
NIH 보조금이 종료된 미국 한 대학의 의사과학자는 네이처에 “여러 나라의 많은 대학에서 미국의 인재유출을 한 세대에 한 번뿐인 기회로 보고 있다”며 “외국 대학들의 입장이 ‘몇명을 모집할 수 있을까’에서 ‘실제로 몇명을 수용할 수 있을까’로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트럼프정부의 과학계 공격은 세계과학계에도 피해를 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도이체벨레는 “유럽, 특히 독일은 미국의 인재 유출로 막대한 혜택을 받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트럼프정부의 전례 없는 과학계 공격은 국제교류 속에서 번성하는 과학연구에 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예를 들어 미국에서 신약개발이 정체되면 전세계 의료 발전이 둔화된다. 현재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고위험전염병이나 조류독감에 대한 데이터가 누락되면 잠재적인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준비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